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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정 문학관 방문하고 나서

 

 



신석정 문학관 방문하고 나서


  나는 가끔 시간이 몽땅 주어질 때면 계획 방향을 정하지 않고 가까운 거리로 떠나는 습관이 있다. 오래된 습관이다. 올해 9월 25일(금) 오전 9시 즈음에 출발했다. 서해로 방향을 정했다. 부안까지 시원하게 뚫린 왕복 4차선 도로를 내달렸다. 창밖으로 내밀은 팔뚝을 스쳐가는 가을바람과 그 향기의 느낌이 제법 좋았다. 시원한 바람과 초가을 들녘의 노란 빛이 어우러져 팔뚝이라는 촉수를 타고 가슴까지 타고 들어오는 느낌이랄까.



  장인께 드릴 사골 선물을 사들고 부안읍 내를 돌아가던 20년 전 기억이 떠올라 시내 방향으로 핸들을 돌렸다. 슬프게도 가난했던 시절에 있었던 자취들은 많이 사라졌다. 그러던 도중 전혀 예기치 않은 신석정 문학관 이정표가 눈에 들어 왔다. 시인의 삶과 사상 그리고 시에 대하여 폭 넓은 이해는 없지만 시 몇 구절과 민족시인 또는 시대를 거스른 저항시인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이름 세자만 보았는데도 설렜다.



  명절 이틀 전이어서 인지 문학관 주차장은 텅 비어 있었다. 제일 먼저 나를 반기었던 것은 정갈하게 다듬어진 소나무 한그루였다. 그 다음 나의 시선을 한참동안 붙든 것은 문학관 왼쪽에서 걷고 있는 시인의 사진이었다. 롱 코트 주머니에 양손을 넣고 걷는 모습은 시대의 아픔을 걸치고 걷는 듯 했으며 실제 걷고 있다는 착각마저 들었다.



  현관을 들어서니 1층엔 상설 전시실이 있고 기획 전시실 그리고 영상 세미나실이 있었다.

최근에 지어진 문학관이어서 그런지 아담하며 관람도 용이하게 설계가 잘 되어 있었다.
2층에는 전시실을 감상한 후 시인의 역정에 대하여 담소를 나눌 수 있도록 작은 탁자가 여러 개 배치되어 있었다.



  그런데 언젠가 현관을 들어서면서 심장이 뛰었던 그 느낌은 없었다.

지금으로부터 약 5년 전 나는 큰 사고를 당한 뒤 황천에 한발만 디딘 후 다시 돌아온 적이 있다. 후각을 잃고 청각 기능에 일부 손상이 있었고 한쪽 눈도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1년 가까이 소요되었지만 유일하게 회복된 것은 눈뿐이다. 당시에 왼눈에 안대를 하고 있었고 퇴원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체력은 바닥이 나 있었다. 삼월 후반 추위도 견디기 힘들 정도였다. 그 즈음 우연히 시골 마을 어른들 봄나들이 가시는 길에 합류하게 되었다.



  신석정 문학관 현관을 들어서면서 문뜩 당시의 기억이 떠올랐다. 지금도 그 강렬한 느낌이 지워지지 않는다. 관광차가 처음으로 방문하였던 곳은 윤봉길 의사의 기념관이 충 의사였다. 현관 입구를 들어서서 처음 읽힌 글귀는 “장부 출가 생불 환”과 “당신의 심장은 지금, 무엇을 위해 뛰고 있습니까?”였다. 내 이마에 샛별처럼 박힌 그 짧은 글귀가 주었던 느낌이 아직도 선연하다. 강렬했다. 시간이 흐른 뒤 나는 혼잣말로 중얼렸다. “큰 사고로 심장이 멎을 뻔 했는데 무엇을 향해 뛰고 있다는 것 보다 마냥 뛰고 있다는 사실만 해도 이렇게 가슴이 벅찬데 무슨 말이야”라고 말이다. 물론 뛰는 심장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라는 주문인 것을 내가 모를리 없었다. 살아 있으니 괜한 투정한번 부려 본 게다. 신석정 시인이 걷는 사진의 모습과 충의사에서의 짧은 문구와 어떻게 일치하는지 문학관 관람 후 알게 되었다. 심장의 4분의4박자와 걸음의 박자가 주는 그 역동감이 일치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사이에는 5년의 짧지 않은 춘추가 있었다.


  신석정 시인은 목가적 시인이지만 서정시 순수시의 프레임에 갇혀서 노래하는 곳에 머물지 않고 자연이란 도구로 사회역사적 문제에 시를 무기로 끊임없이 저항했던 참여 시인이었다. 문학관 방문 전까지만 해도 시인에 대하여 계략적으로 알고는 있었으나 상세하게는 모르고 있었다. 눈에 처음으로 주어 담은 시는 ‘꽃덤불’ 이었다. 신문학 1946년 6월호에 게재되었고 8.15 해방 공간속에서 쓰인 시다. “몸을 팔아버린” 적도 없고 남을 팔아버린 적도 없는 시인이 그토록 염원하던 해방이 되었으나 들뜨지 않고 “겨울밤 달이 아직도 차거니” 로 냉철한 이성을 보이고 있었다. 해방이후 다가올 민족 분열의 서막을 이미 예측이라도 했던 것일까. “남들이 춤을 추고 있을 때에는 그는 분수처럼 쏟아지는 태양을 안고 그 어느 꽃 덤불에 안길 그날을 냉정히 기다리고 있는 것”이라고 꽃 덤불을 소개하였다.



시인은 일제강점기 1930년대 말 모국어의 마지막 보류였던 문장지의 지구가 나온다. “뼈에 저리도록 [생활]은 슬퍼도 좋다”고 했다. 물론 역설이다. 언젠가는 이 굴욕의 역사를 벗어날 수 있다는 믿음을 한시도 포기하지 않았으며 그 꿈꾸기를 그만둔 적이 없다. 그리하여 끝까지 붓을 꺾지 않았다. 낙향을 선택하였다. 당시의 문인들 중엔 일제에 협력하고 일신의 안위를 꾀하는 부류도 있었다. 그 유명한 “어머니의 품으로 돌아가는 날”을 읽다보면 어떤 혁명과의 결연한 의지의 포효가 들려오는 듯 하다.



  1972년 10월 문학과 사상 창간호에 “시정신과 참여의 방향에 대하여” 라는 산문에 시인의 시론이 간결하게 정리되어있다. “부조리와 현실에 대한 인간의 성실한 저항이 누구에게 보다도 시인에게 요구되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라고 했다. 이것이 “예술가의 소중한 양심으로 통하는 길이기 때문” 이라고 매듭짓고 있다.



  1973년 12월 지병으로 쓰러져 7개월 간 외롭고 눈물겨운 투병 생활이 지속되었다. 병상에서 쓴 마지막 시 “가슴에 지는 낙화 소리”를 옮기며 기행문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백목련 햇볕에 묻혀 / 눈이 부셔 못 보겠다. / 희다 지친 목련 꽃에 / 비낀 사월 하늘이 더 푸르다. / 이맘때면 친굴 불러 / 잔을 기울이면 꽃철인데 / 문병 왔다 돌아가는 친구 / 뒷모습을 볼 때마다 / 가슴에 무더기로 떨어지는 / 백목련 낙화소리.....



  시를 다 읽고 나니 “가슴에 무더기로 떨어지는 낙화소리” 가 다시 증폭되어 사분의 사박자로 다시 들려오는 것 아닌가 맞다! 꽃잎이 지는 소리가 아니라 부활하는 심장의 고동소리였던 것이다. 윤봉길의사의 거친 심장소리와 신석정 시인이 시공을 초월하여 문학관 왼 켠을 걷고 있는 시인의 발자국 소리와 8비트 16비트로 함께 뛰고 있었다.



문학관 현관문을 나서는 나의 어깨를 조용히 다독이며 “당신의 심장은 지금, 무엇을 향해 뛰고 있습니까?” 신석정 시인은 그렇게 내 등 뒤에 서서 묻는 듯 했다. 내 어깨엔 여름과 가을과 겨울이 함께 걸려있었다. 무거움과 쓸쓸함, 시련이 함께 드리워져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그 고달픈 물음을 끝도 모르게 되뇌었었다.


 

글 이하일 (익산참여연대 회원)

 


- 이 글은 참여와자치 소식지 73
호 회원글에 실린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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