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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글]근대역사가 숨쉬는 新都市 裡里 만들기. 김홍균

 

 

근대역사가 숨쉬는 新都市 裡里 만들기



글 김홍균 (전주기전대학 허브조경과 교수)

 


 요즘은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컴퓨터에 앉아 뉴스 등의 언론을 보며 하루를 시작한다.

2016년은 역사 속의 한 페이지에 크게 남아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우리가 사는 지금은 먼 훗날의 역사다. 남아서 후손에게 들려질 수도 있고 먼지처럼 사라져버린 역사가 되어 버릴 수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사는 지역, 익산은 어떠한 역사로 남겨질까? 가지고 있는 역사적 자원은 많으나 역사책의 한 페이지조차도 차지하지 못하는 지역, 풀어야할 내용은 많으나 풀리지 않는 지역이라 남겨지게 되는 건 아닐까? 안타깝지만 내 고향 익산은 그런 도시인 것 같다.
 그리되어지지 않기 위해서, 고대도시만을 논하는 익산뿐 아니라 타에 의해서 이긴 하나 근대화 되어 지역이 형성되어졌음을 알리는 역사가 필요하다고 볼 수 있기에 지금은 사라진 당시의 신도시“이리(裡里)”에 대하여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우리 익산은 삼국시대 백제 30대 무왕의 고향이며 천도되어지지 못한-정확한 표현인지는 아직 모르지만- 왕궁이 있던 곳, 통일신라시대 당시의 보덕국, 고려시대 1344년 원나라 순제의 제2황후가 된 기황후의 외가가 있는 지역, 그로인해 금마군이 익주로 승격되었고 조선시대 에는 전주부에 속한 4개의 군현(익산군, 여산현, 함열현, 용안현)이었다.
 그 후 한말 일제 강점기시 전국을 13도로 개정하였을 때 1899년 전주에 속해있던 남일면(현 중앙동 등), 동일면(현 춘포면 등), 남이면(오산면 등), 서일면, 북일면이 익산군에 편입되어지게 되어 현재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고 1931년 4월에 익산 읍으로 승격되어지고 그해 11월 이리 읍으로 개칭하여 지게 된다.

 

 익산의 근대화는 정확히 말하면 없어진 도시, 당시의 신도시인 이 곳 이리라고 개칭되어진 도시를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이리의 근대화는 초기 외국인의 익산군에 대한 메모를 근거로 1890년대에 형성하기 시작했다고도 보여 진다. 1898년 설립된 익산군 오산면에 위치한 익산 남전교회는 작은 한옥 또는 초가지붕 건물에 있는 작은 시골 교회로 미국 장로교 선교사들에 의해 만들어 졌으며 그들은 인근 마을에 교회를 설립하는데 적극적이었으나 1900년대에 들어서며 호남의 곡창 지대에 대한 일본인들의 관심으로 인하여 일본인에 의한 도시로 설립 되게 되었다.
 이리는 일제 강점기시대 이전에 솜니 또는 솝리라는 이름의 약 3,776명의 지역민이 살고 있는 작은 농업 마을 이었다. 일본인이 들어와 지역에 그들의 방법에 따라 "솜리" 마을의 이름을 따와 “이리(裡里)”라는 이름이 만들어 지게 되어 진 것이다. 이러한 명명은 일본인의 발음에 의해 솜리가 이리가 되었음을 감안하게 되며 이는 일본인에 의한 근대도시 이리가 형성되어졌다고 볼 수 있다. 일본인들이 호남평야의 중심부, 교통의 요지인 점을 감안하고 만경강 유역의 황무지 개척을 목적으로 모여들었으며 1906년 전중부차랑(田中富次朗)이 군산에서 이곳으로 자리를 옮김이 신도시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또한 1909년 말 호남선 측량의 시작과 함께 익산이 알려지기 시작하였으며 1911년 철도공사가 시작되어 지면서 익산군청, 우편소, 익산 헌병분대, 익산 변전소 등이 금마에서 남일면(현 중앙동)으로 옮겨졌고, 이에 맞추어 대교농장의 대표인 일본인 지길원신(枝吉元信)등 34명의 일인들은 익산번영조합을 설립하여 시가지의 계획, 도로의 개착, 교육/경비기관 등의 시설 및 관공서 등의 설립 및 이전에 관여하게 된다.
 1912년 호남선의 개통으로 익산역보선구와 기관구가 개청되어졌다. 1912년에 익산공립소학교(현 중앙초), 1913년에 익산공립보통학교(현 이리초)와 익산국립농림학교(현 전북대 익산캠퍼스)가 세워지게 되었다. 이는 이리의 성장을 촉발하는 계기로 익산의 초기 근대도시 중심의 일제 강점기식 개발을 위해 허용된 철도였다라고 본다. 이리는 사방이 농지를 가진 지역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철도 개통 이후 전주와 김제에서 생산되어진 식량이 익산을 통과하여 군산으로 수탈하는 과정의 역할을 하는 일종의 허브도시였다.
 그 이유로 익산의 개발은 지역 농장주인 일본인들의 관심을 받아 크게 일어났다. 익산의 도심을 농지에 쉽게 접근 할 수 있게 골드러시 방식으로 계획하고 은행, 쌀 재벌, 기업이 그들이 계획한 지역에 몰려 유기적으로 발생하였다. 일본의 이러한 익산 근대화는 일본인의 농업 구조 조정에 의한 사악한 계획으로 발생하게 되었고 이는 자본이 부족한 한국농민들에게 끔찍한 영향을 미쳤다.

 

단순히 현재에 지도를 보고 당시 이리의 공간 배열을 이야기하여 보면 도시의 성장에 대한 합리적인 가정은 현존하는 중앙동과 그 주변 지역에 건축물은 일본식 구조들이었다. 이러한 구조는 당시 거의 어떤 방향으로든 중앙동 근처 및 주위에 원을 형성하고 발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를 토대로 익산의 근대역사를 접근하여 숨어 있었던 자원을 발굴하여 숨 쉬는 신도시 이리 만들기를 접근하여 볼 수 있을 것이다.

 

 



 공간의 배열 특성 상 익산역을 중심으로 한 당시의 건축물 및 공간터를 살펴보자면 익산역 우측으로 이리역 관사촌이 존재하고 있으며 호남선 개통이후 100년 이상의 세월이 흐른 공간으로 외형적 변형의 흔적을 볼 수 있으나 당시의 상황을 자연스럽게 유추하여 볼 수 있는 공간으로 남겨져 있으며 익산 등록 문화재 제181호로 등재되어 있는 익옥수리조합(현 익산문화재단), 평화동에 위치한 나루또(명문)여관, 영정(현 문화의 거리)에 위치한 당본오랑송이라는 일본인이 운영한 의복점을 비롯한 당시의 건축물들이 남아있어 당시의 모습을 희미하게나마 유추 할 수 있게 만든다. 또한 등록문화재 제180호로 지정되어 있는 삼산의원, 동양척식주식회사 관사 및 사택 등을 볼 수 있으며 이리공립농림학교(현 전북대 익산캠퍼스) 및 이리공립보통학교(현 이리초등학교)가 있으며 남부시장(구시장)내에 대교농장과 와교농장 등이 펼쳐져 있으며 당시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상당수의 가옥들이 현존하고 있는 상황이다.


 



 또한 지금은 건축물 등은 없어졌으나 당시와 같은 공간에서 같은 업무를 보는 공간들이 꽤 많이 존재하고 있다. 조선식산은행은 현재의 제일은행자리에 위치하고 있었고 동양척식회사는 기업은행자리에, 우리은행자리는 삼남은행이 위치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형태는 없지만 그 의미는 그 자리에 있음을 이용객 및 관광객들에게 알릴 수 있도록 계획되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넓지 않은 지역 내에 많은 근대문화 유산이 모여 있음은 익산의 축복이라 할 수 있다.
 익산의 근대를 이야기 할 수 있는 구슬은 매우 많다. 그러나 이를 어떻게 꿰느냐가 중요한 사안이라 보여 진다. 이에 따라 익산역을 중심으로 한 근대 문화의 거리를 조성하여 역사적인 공간의 창출과 함께 잊혀져가는 신도시 이리를 재발견할 수 있는 계기로 마련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는 익산 속 근대문화로 다시 태어나는 이리를 발견하여 문화관광의 새로운 모습으로의 공간을 마련, KTX 이용자들을 관광객화 함에 매우 중요한 자원이라 할 수 있다.
 익산의 대표적 축제라 할 수 있는 익산 보석축제, 익산서동축제, 익산 천만송이 국화축제는 오브제적인 성격이 매우 강하다. 축제기간 이외에 즐기기엔 한계를 느끼는데 반해 신도시 이리의 조성에 따른 고정적 자원을 활용하여 진행할 수 있는 축제를 만들어 낼 수 있으며 평상시 문화공간으로도 활용하기에 매우 좋을 것이다.

 


 

 익산 속 이리, 근대도시로의 익산은 고대역사와 함께 매우 중요한 주제로 사료되어진다. 익산역는 호남선과 전라선의 KTX가 접근하는 호남의 유일한 역으로 현재 이용자의 숫자는 매우 높으며 앞으로 더욱 많은 이용자가 있을 것으로 보여 진다. 이는 익산역을 중심으로 한 볼거리, 먹거리, 즐길 거리를 만들어야 하는 가장 큰 당위성이며 그에 최적화되는 자원은 근대문화가 아닐까 한다. 이를 상품화하여 이용자의 행태가 많은 익산역 주변을 근대 관광의 중심으로 만들어 낸다면 무료하게만 느껴졌던 익산의 볼거리에 큰 활력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고대도시 익산과 근대 신도시 이리의 연계성은 그 누가 보더라도 멋진 작품이 되어 지리라 생각하며 추후 실행에 옮기는 작업이 필요할 것으로 보여 진다.
 할당 되어진 지면의 한계로 좀 더 많은 양의 내용은 담지 못하여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하며 글을 맺는다.

 


- 이 글은 익산참여연대 소식지 참여와 자치 77호 회원글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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