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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연대 이야기 마당

'서약'과 '맹세'가 영혼을 잠식하다

'서약'과 '맹세'가 영혼을 잠식하다.


 

글 권오성 (문화평론가)

 

 

 요새 부쩍 몸과 맘이 고달프다. 개인 처지에 딸린 이유도 있지만, 시국 상황이 더 큰 이유이겠지 싶다. 머리 아픈 상황을 쉬어갔으면 해서 내 인생의 영화 하나를 소개하려 한다. 십 수 년 전 한 매체에 쓴 글을 다시 정리해 보니, 게으른 필자를 읽고 난 뒤에 탓하시라!

 

 

 <더 플레지>(The Pledge, 맹세·서약, 국내 개봉명은 '써스펙트'이지만 이하 원제로 쓴다.) 영화 제목에서 풍기는 느낌만으로는 그저 엄숙하거나 잘 짜인 스릴러 영화로 보인다. 그래서 보는 이에 따라서는 지루하고 허무한 추리 영화라고 혹평할 수도 있지만, 필자에게는 '인생'과 '세계(관)'를 통찰하는 사뭇 진지한 영화였다. 우리가 그래야 한다고 믿는 그 많은 '서약'과 '맹세', 그래서 '너무나도 당위인 것'이 어떻게 사람을 변화(혹은 파멸)시킬 수 있는지를 '서정성'으로 보여주는 영화는 근래 영상을 통해 얻은 가장 큰 수확이었다.

 

 

 황량하고 허름한 가게 앞에서 미친 듯 노인이 혼자서 중얼거린다. 몽롱하고 단호한 시선이 오가는 그의 얼굴은 연신 뭔가를 읊조리며 흔들린다. 새들의 비상하는 모습과 겹치며 영화의 처음과 끝을 장식하는 이 장면은 음악과 함께 슬프지만 잔잔한 울림을 준다. 과연 이 노인은 무슨 말을 지껄이고 있는 것일까? 전에는 여느 사람처럼 멀쩡했을 노인을 이 지경으로 만든 건 도대체 무엇인가?

 

 

 범상치 않은 배우 숀 펜이 세 번째로 감독한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보면서, 무언가가 엄습했다는 느낌을 받는다. 감동인지 아니면 충격인지는 확실하지 않고 분간할 수 없다. 둘 다 아닐 수도, 그럴 수도 있겠다. 우리네 삶이란 게 장밋빛 미래를 결코 기약할 수 없고, 느닷없고 어처구니없는 사건으로 굴절될 수도 있다는 깨달음을 얻었다면 그 걸로 충분하지 않을까.

 

 

 몇 시간 후면 은퇴하는 베테랑 경찰 제리(잭 니콜슨)는 동료들의 만류에도 유아를 살해 유기한 범죄 현장에 나가기를 자청한다. 퇴직 연금으로 평소 좋아하는 낚시를 즐길 일만 남은 그의 노년 생활은 여기서부터 심상치 않은 전환점을 맞는다.

 

 

 아이를 잃은 슬픔에 오열하는 부모는, 소식을 전하러 찾아간 제리의 눈앞에 십자가를 내보이며 다음 맹세를 거듭 다짐한다. "이 십자가에 당신의 영혼을 걸고서라도 범인을 꼭 잡아 주세요!" 부모의 절박한 심정이 종교적인 의례와 만나는 상황에서 이를 외면하긴 쉽지 않다. 제리는 이 다짐을 그저 다른 현역 동료에게 떠넘겨도 됐을 법하지만, 끝내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지고야 만다. 퇴역 경찰 제리의 범인 찾기는 유력한 용의자의 자살과 옛 동료들의 외면 속에서도 멈추지 않는다.

 

 

 아니 그는 오히려 인근 지역에서 발생했던 다른 유아 살해 사건들과 유사점을 발견하면서 수년간의 연쇄살인 의혹으로까지 수사를 확대한다. 과연 그의 수사는 올바른 방향을 찾고 있는 것일까? 범인을 추적하기 위해 길가의 허름한 가게를 인수하면서까지 제리는 수사 의지를 꺾지 않는다. 물론 범인 찾기에만 매달리는 것은 아니다. 틈나는 대로 한가롭게 낚시를 즐기고, 남편의 폭행을 피해 온 로리 모녀와도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일전에 다짐한 맹세의 강박은 곳곳에서 그를 옥죄어 온다. 흥겨운 퍼레이드 현장에서 살인 현장을 신고했던 소년과 마주치고, 오가는 차량을 보며 범인의 여러 흔적과 단서들을 떠올린다. 게다가 로리의 딸 크리시에게 접근하는 개척 교회 목사의 행동을 목격하면서 그의 영혼은 서서히 무언가에 잠식되어 간다.

 

 

 선량한 퇴역 경찰에게 마지막으로 ‘선사’하는 영화의 결말은 기존 통념과는 상당히 다르다. 어쩌면 평생을 경찰로 살아온 제리에게 은퇴는, 삶의 중요한 지향점을 잃어버린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맹세에 대한 ‘집착’은 실존 문제였을 것이다. 하지만 적당한 타협과 안주 속에서 사는 것이 강박을 이기지 못해 자신을 잃는 삶보다 나을지 모를 일이었다.

 

 

 애초부터 영화는 <유주얼 서스펙트>와 같이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의외의 범인을 밝히는 유희 섞인 반전에는 큰 관심이 없다. 아니 오히려, 지극한 선의를 가진 행동일지라도 그 결과가 예기치 못한 종말로 이어질 수 있다는 이 ‘비관 섞인’ 영화는,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신념’과 ‘당위’라는 미명하에 강요당하는 우리 사회의 무수한 '맹세'에 대한 성찰을 요구한다.

 

 

 일련의 살인 사건을 소재로 인간의 실존 가치를 따진다는 측면에서 이 영화는 우리 영화 <살인의 추억>과도 견주어 볼 법하다. 하지만 숀 펜이 영화의 처음과 끝에서 인생의 비관과 본질에 대해 보다 근본 질문을 슬프지만 ‘유려하게’ 던지고 있는 반면, 봉준호는 우리

시대의 구조 모순과 책임 방기를 다소 도식화해 지적한다. 때문에 더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요컨대 '정의'와 '신념'이 '강박관념' 혹은 '정신적 외상(트라우마)'으로 옮겨가는 과정을 이토록 자연스럽게 보여주었던 색다른 영혼의 영화를 접했던 적이 없다. 영화는 자신이 충분히 할 수 있고 그럴 기회가 충분한‘정의’가,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굴절될 수 있다는 새삼스러운‘진리’를 깨우치게 하는 수작이다. 처음과 끝을 장식하는 잭 니콜슨의 모습이 그저 영화의 한 장면으로만 보이지 않는다. 혹시 지하철역이나 길거리에서 마주칠지도 모를 미친 노숙자의 과거가 지금의 내 모습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 속에서.

 

 

- 이글은 익산참여연대 소식지 참여와자치 77호 기고글에 실린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