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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마당

장시근 대표 소개

 

회원과의 만남 – 장시근 대표

 

 

 4년 동안 대표님을 뵈면서 많이 친하다고 생각을 했는데 인터뷰를 한다고 하니 많은 부담감이 있었기에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평상시 만남에서는 어려운 대표님이라기보다는 친근함이 있는 대표로 느꼈었는데... 부담감이 느껴지는 만남이 되지 않을까 내심 걱정하면서 대표님을 만나러 발길을 옮겼다.
하지만 그러한 걱정을 뒤로한 채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대표님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대표님이 강직하고 뚝심이 있었기에 힘든 시기를 잘 견디고 현재의 참여연대를 만들어내지 않았나?’라는 생각을 갖게 만드는 시간이었다.

 

▶ 대표님께서는 참여연대와의 인연이 어떻게 시작되셨어요?
 익산참여연대는 총 3개 단체가 통합되어 창립을 하였습니다.「갈숲마을 (93년 태동. 97년 생활문화원으로 명칭 변경), 새시대노동자회 95년 출발, 익산청년회 96년」저는 갈숲 마을이 시작 되었을 때부터 활동을 했구요. 본격적으로 열심히 참여했던 과정은 2007년 지방자치연구회가 만들어지면서 2주에 1회씩 소통하고 공부했던 모임에서입니다.

 

 

▶ 갈숲마을 활동도 좋았지만 아내분을 만나 더 좋은 것 아니었나요? 연애당시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제가 전북대 83학번인데 90년대는 사회적으로 많이 힘든 시기였잖아요. 물론 학생시절은 아니었지요. 당시 익산시민운동단체인 갈숲마을은 어지러운 사회에 대한 억압을 당하지 않고 자신들의 뜻을 가지고 활동했던 단체였어요. 그러면서 자유롭게 활동이 보장된 곳이었지요. 아내와 만남이 시작된 것은 1994년부터 시작되었어요. 당시 갈숲마을에 풍물을 배울 수 있는 소모임을 구성을 했는데 그때 제 아내가 풍물모임 선생으로 오면서 만남이 시작되었지요. 풍물을 배우면서 제 아내에게 호감을 갖게 되었고 1996년부터 연애를 해서 97년도에 결혼에 골인을 하게 되었답니다.^^

 

 

▶ 현재 하시는 일은 무엇인지요?
 현재는 건축일에 종사를 하고 있어요. 전국 곳곳에 가서 제가 필요한 곳에서 일을 하지요. 저의 고향은 진안이구요. 대학도 전주에서 나왔어요. 제가 현장을 택한 것에는 나름 이유가 있는데 대학시절 저의 진로방향을 노동운동에 쪽으로 두고 있었었어요. 그래서 많은 시간을 현장에서 활동을 많이 했었어요. 울산에서도 선반 만들기부터 군산 대우자동차협력업체로 일도 했지요.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요. 결혼 후에도 지방 현장으로 많이 다녀서 가족들이 많이 힘들어도 했어요. 특히 아내가 아빠의 빈자리 역할을 해주느라 많이 고생했어요.

 

 

▶ 그렇겠어요. 가정에서 아빠의 역할이 많이 필요한데 많이 지금은 애틋 하시겠어요?
그렇죠. 결혼 후에 2010년까지 가족과 떨어져 생활을 하느라 가족들이 많이 힘들어 했죠. 그래서 그런지 아이들과의 대화도 별로 없었고 그래서 아이들이 아빠에 대해 많이 무서워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더라구요. 아이들이 어렸을때는 대화를 잘못했지요. 그런데 아이들이 크고 생각이 커지니까 조금씩 이해를 해주려나?... 잘은 모르지만 딸하고는 소통을 많이 하고 있어요. 아들하고는 아직도 어려움이 있답니다. 남자라서 그런가^^. 지금 생각해 보면 ‘지금까지 내가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살고 있지 않은가’ 라는 반문도 많이 하고 있어요. 아이들이 반듯하게 커준 것도 고맙고 옆에서 묵묵히 잘 이겨내 준 아내에게도 많이 고맙죠 뭐. 그래서 요즘은 가족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노력을 하고 있답니다.

 

 

▶ 대표님이 생각하는 아빠는 남편은 어떤 분이신가요?
 글쎄요. 아마도... 가정에서는 많이 보수적이구요. 가부장적인 남편이에요. 아이들에게는 물론 친절하지 않은 그냥 일주일에 한번 씩 집에 와서 얼굴만 비춰주는 아빠? 가정에 많이 못해줬지만 지금은 많이 챙기려고 노력을 하고 있어요. 그렇게 노력하다보면 좋은 결실을 맺을 것이라 믿습니다. 저는 그래요 가정에서나 어디에서나 ‘배려하는 사람, 가장 마지막까지 끝까지 같이 있어주는 사람’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했었고 현재도 그렇게 살기 위해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제가 대중가요 중에 가장 좋아하는 노래가 있는데요. 이승철의 ‘그런 사람 또 없습니다.’에요. 가사에서 전해져 오는 것이 우리가 앞으로 살아가야 하는 삶에 대해 말해주는 것 같아서 매우 좋아한답니다.

 

 

▶ 아내분도 참여연대 활동을 열심히 하고 계시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네. 현재 풍물반에서 활동을 하고 있어요. 예전에 제가 밖에서 활동을 하고 있을때는 몰랐는데 혼자활동 하는 것보다는 함께 사회활동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은 것 같아요. 물론 아내도 조금씩은 활동을 하기는 했지만 제가 일을 하러 다닐 때 혼자서 아이들을 챙기고 가정을 돌봐야 했기 때문에 많은 활동을 하지 못했었어요. 아이들이 다 성장하고 나서 픙물 활동을 본격적으로 하기 시작했는데요.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니 너무 좋더라구요. 그래서 앞으로도 아내의 활동을 많이 지원해 주려구요.^^

 

 

 

 

▶ 처음 대표를 제안 받았을 때 어떠셨어요?
 처음에는 안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참여연대 지방자치위원회 창립멤버로서 연대에 대한 남다른 생각이 있었던 터라 쉽게 거절을 하지 못했어요. 처음 제안을 받았을 때는 이렇게 조직이 어려울 때 나조차도 조직의 요구를 저버린다면 조직은 살아남지 못하겠다는 생각도 있었고, 개인보다는 조직을 먼저 생각하게 되었어요.‘내가 지금 대표직을 회피한다면 시대정신에 부합되지 못하는 것이다’라는 생각으로 수락을 하게 되었어요 또한 조직인 진정으로 어려울 때 나서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그렇게 생각을 하면서 참여연대를 제대로 세울 방법에 대해서 고민을 하게 되었어요. ‘이것이 나의 운명이다’라고 생각도 했어요^^.

 

 

▶ 4년여 동안 대표직을 맡으시면서 많이 힘드셨을 것 같은데요?
 제가 대표직을 맡았을 때는 참여연대가 가장 어려움이 있을 때 였잖아요. 그러다 보니 참여연대 조직을 먼저 생각하게 되더라구요. 사무처와도 수직적 관계보다는 수평적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나보다는 참여연대 조직을 추수리는 일에 전념을 다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이런 생각은 대표가 되어서 느낀 건 아니구요. 일반 회원일때부터 들었던 생각이었어요.‘대표니까 대우를 받아야겠다.’라는 생각을 하면 안된다고 생각을 했기 때문에 조직을 먼저 추수리고 사무처와의 관계 개선과 회원들과의 편안한 관계, 참여연대의 위상을 높이는데 전념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이런 일들이 처음에는 물론 힘이 들었지만 하면서 서로가 신뢰를 찾고 믿음을 불어 넣는 원동력이 된 것 같아요. 그래서 지금은 뿌듯합니다.

 

 

▶ 대표직을 수행하면서 아쉬운 점이 많이 있을 것 같아요?
 아쉬운 점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지요^^. 그렇지만 아쉬움의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없는 것 같아요. 어떤 조직이든 중요한 것은 참여형이 아닌 관리형의 조직체계를 꾸리면서 서로간의 믿음으로 조직이 성장해 나가야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저도 처음에 그러한 참여연대를 만들고 싶었는데 관리부분이 잘 안된 것 같아요. 또 한 가지는 사무실에서 상근하는 활동가들에게 지원할 수 있는 처우개선을 못한 부분이 가장 큰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어찌되었건 상근하는 활동가는 우리시대에 맞는 올바른 정신을 각인하면서 내안의 사람들의 어려움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서로 의지하고 믿음을 쌓아 가야만 된다고 생각이 듭니다. 이것이 무너지면 조직이 성장할 수 없으니까요.

 

 

▶ 1-2년도 아니도 4년 동안 대표직을 하면서 가정에서의 갈등도 있었을 텐데요?
 물론 없었으면 거짓말이겠죠!^^ 예전에 지방에서 일할 때 6개월 이상 출장을 갔을 때도 아내나 아이들에게 많이 미안하고 많이 힘들었는데 대표를 4년 하는 동안 아내가 많이 힘들었을거에요. 대표다보니 여기저기 회의도 많고 집에 일찍 들어가는 때보다 늦게 들어가는 일이 비일비재했으니까요. 그런데도 잘 참고 잘 견뎌준 아내에게 많이 고맙죠.

 

 

▶ 대표직을 그만두고 향후 계획이 있으시다면?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제가 매우 적극적이고 활동적인 사람으로 보일 수 있어요^^. 하지만 저는 전형적으로 내성적인 성격의 소유자로 앞장서서 나서는 것을 두려워했답니다. 물론 필요에 있어서는 그 일을 해내지만 어쨌든 4년 동안 대표 일을 하면서 많이 극복이 된 것 같기도 하고^^. 앞으로 계획이 있다면 현재도 그렇지만 저는 사회운동을 열심히 했다고 자부심을 느낍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한테 맞는 활동을 뒤에서 묵묵히 열심히 할 거구요. 활동하는 것과는 별개로 지금까지 돌아보지 못했던 나 자신에 대해서 다시 한번 돌아보는 시간을 갖을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삶을 1막이라고 하면 이제는 나 자신을 알아가고 삶에 대한 고민도 함께 하면서 제2막의 인생을 여는 시간을 가질 계획입니다.

 

 

 

 

 

▶ 마지막으로 참여연대에 하고 싶으신 말이 있으시다면?
 대표의 직은 매우 힘들고 어려운 길인 것 같아요. 한 조직을 이끌고 가는 수장의 역할로 개인보다는 조직이 우선이어야 하는 중대한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으로 이 시대에 맞게 부합되는 올바른 수장으로의 역할을 함과 동시에 참여연대 또한 수장과 같은 생각과 같이 활동을 해야겠지요. 물론 조직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의견충돌이 없으면 조직은 성장할 수 없습니다. 진정으로 조직이 우뚝 서기 위해서는 의견충돌역시 서로의 배려와 믿음으로 극복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갈등이 있은 후에는 서로가 인정을 하게 되고 단체도 많이 성장할 거라 믿습니다. 익산참여연대가 창립된 지가 20년 가까이 되고 있잖아요. 앞으로도 서로가 인정하고 일반 시민들에게 좀 더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고, 시민사회단체로 인정받고 신뢰받는 단체로 거듭났으면 하는 바램이 있어요. 이러한 희망이 참여연대가 더욱더 발전할 수 있는 초석이 되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진정으로 참여연대 조직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개인의 일보다는 조직이 우선이었던 장시근 대표는 진정으로 참여연대의 수장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약간 여성스럽고 약해보이지만 내면은 너무나 강직하고 투철한 조직 활동가로서 자신의 소신에 대해서는 굽힘없이 뚝심이 강한 모습에 또 한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참여연대라는 단체의 장을 맡고 있는 것만으로 많은 어려움과 단체를 책임지고 이끌고 나가야 한다는 부담감이 많이 있었을텐데도 소박하고 소탈한, 그러면서도 다정다감한 모습을 보면서 대표라기보다는 옆집 사는 아저씨처럼 느껴지는 편안한, 정말로 인간적인 미가 흐르는 분이었기에 4년 넘게 대표직을 수행하면서 별무리 없이 단체를 이끌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을 해본다.
그리고 4년 동안 너무나 고생이 많으셨고 사랑한다고 전하고 싶다. 그리고 대표님은 언제까지나 참여연대 대표로 남을 것이다.

 

- 이글은 익산참여연대 소식지 참여와자치 77호 회원과의 만남에 실린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