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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송 전형필

6월 책익는 마을 후기

 

 

 

간송 전형필을 읽고

지난 월요일(6.08) 남중동 커피플라워에서 책익는 마을 6월 정기모임이 진행됐습니다.


보물이 된 낡은 물건들. 나라의 문화재를 지키기 위해 전 재산을 쓰고 일생을 바친 간송 전형필을 이해하고,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는 어떤 마음으로 문화재를 모으고 지켜 냈을까?

그가 모으지 않았다면 우리의 문화재는 어떻게 되었을까?

 

 


간송 전형필 선생님 1906년 종로4가에서 태어났다.

당시 우리나라 최고의 부잣집에서 태어났지만 결코 사적으로 호의호식하지 않았다.

젊은 시절 언제나 여름에는 삼베 저고리, 겨울에는 흰 두루마기 옷만을 입었다. 일제 치하에서였다.


증조부 전계훈은 종로 4가의 거의 모든 상권을 장악했고, 대농장을 구입, 수만 석을 추수하는 대지주로 성장한다.

전계훈의 맏손자 전영기가 바로 간송의 부친이다.


간송은 당연히 어릴 적 남부러울 것 없이 자랐다. 성품이 온화하고 학문을 사랑하여 책 읽기를 좋아했으며, 유년기에 집안 어른들의 총애를 한 몸에 받으며 자랐다.


간송을 총애하던 조부 전창엽이 서거한 연후에 이듬해 작은 할머니가 연거푸 타계한다.


작은 할아버지마저 80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고 불과 두 달 후 친할머니마저 세상을 떠난다.


이어서 작은 아버지가 서거하고 간송의 유일한 친형이 28세 나이에 생을 마감한다.


친형을 잃은 1919년은 우리에게 독립 의지의 표상인 3.1운동이 일어났던 해로 잘 알려져 있다.



간송의 평생의 지기는 역사소설가로 널리 알려진 월탄 박종화 선생이다.


월탄은 간송의 이종사촌 형으로 일찍부터 문학과 역사, 철학에서 두각을 드려냈으며 나중에 사회주의와 친일세력 모두에게 거리를 두면서 국가와 민족의 장래를 위해 골몰한 선각자였다.


간송 일생의 중대한 인연을 휘문고보에서 만나게 되는데 그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이자 민족주의자였던 춘곡 고희동이었다.


춘곡은 젊은 간송의 민족과 미래에 대한 고민을 알고, 스승으로 모시던 위창 오세창 선생에게 간송을 소개한다.


위창과의 만남은 간송으로 하여금 미적 안목을 초월해서 평생토록 인의예지의 삶을 추구하게 해주었다.


위창 오세창은 서구문화를 등에 업은 일제가 우리 문화를 노골적으로 말살해가려 했을 때, 우리 고유의 문화와 정신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일이야말로 일제의 어두운 야욕으로부터 민족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우리 민족문화재 수집과 서화사를 총정리했다.



23세의 간송이 43세의 춘곡을 따라 65세의 노대가 위창을 찾은 것은 우리나라 고미술사에 있어서 일대 사건이었다.


어려운 시절에 부모의 재산을 물려받아 23세의 나이에 조선 최고 부자 중 하나가 되었지만, 민족을 생각하고, 문화를 수호하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확인한 것이다.


특히 '문화 독립운동'이라는 개념을 이해하는 간송의 젊고 맑은 눈빛에 위창도 어느새 감화되어갔을 것이다.


위창은 간송에게 그 맑음에서 '물 흐를 涆간'자를, 그리고 변하지 않고 지속되는 뜻을 기리는 「논어」 자한편에 나오는 '날씨가 추워진 연후에야 소나무,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알 수 있다.'는 명문에서 '소나무 松송'을 써 간송이라는 호를 선사했다.



빛나는 보물을 모아둔 집. '보화각'


간송이 수집하는 루트는 한남서림에 찾아오는 수많은 거간들의 서화, 골동을 후한 값에 사들이는 경우가 있었고 각종 경매에 나오는 귀중한 유물을 수집하는 경우도 있었다.


가치를 매길 수 없이 귀중한 민족유산이라고 판단될 경우 주요한 가산을 처분하는 일마저 서슴지 않았다.


우리 민족 문화사를 관통하는 거의 모든 시기의 거의 모든 작가의 작품을 구입했다는 점이었다.


고려470여 년, 조선500여 년의 객관적 이해를 하기 위해서는 영.정조와 같은 번성기의 작품뿐만 아니라 이민족 침략이 있었던 암울한 시기의 작품도 수집해야 한다고 생각 했던 것 같다.


이렇게 어렵게 모아둔 수장품이 흩어지지 않도록 박물관을 만들어 이를 체계적으로 연구 관리하려 했다.


1933년 간송이 막 27세를 지났을 무렵 성북동 초입의 땅 수만 평을 구입했다.
위창은 간송을 위해 간송이 구입한 부지를 '북단장' 이라고 명명해주었다. 그리고 간송은 당시 가장 명망 있던 최초의 근대 건축가 박길룡에게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박물관의 설계를 의뢰했다.

1938년 8월 중순에 상량식이 거행되었는데 이날의 기쁨을 위창은 빛나는 보물을 모아둔 집이라는 뜻의 '보화각'이라는 이름을 선사하면서 멋지게 표현했다.


보화각 건립 이후 간송의 수집 열정은 단순한 재화의 축적이나 아름다운 대상을 감상하는 여가의 차원을 초월했다는 것이 사실로 드러나게 된다.


민족 미술을 보호하고 다가올 해방의 날, 흩어지고 퇴색되었던 우리민족의 자긍심을 되살리는 창이 되고자 했던 것이다.


문화재는 단순히 아름다움의 대상이 아니라, 한 민족의 정신을 집결해주는 유대의 연결고리이자 현재의 자기를 다시 정립시켜주는 불빛이기 때문이다.


보화각이 건립되고 간송은 삼국시대의 불상, 고려시대의 석불 등 많은 유물을 묵묵히 수집해 나갔다.


한편으로는 재정이 어려워진 보성고보의 인수를 결정해서 민족의 교육 사업에 헌신하는가 하면 효제동 동화 인보관의 양로원 등 수많은 기관에 기부를 하면서 구제 사업에도 힘썼다.



간송 전형필 (1906년-1962년)

경력 : 1938년 보화각 설립  1940년 동성학원 설립
학력 : 휘문고등보통학교 와세다대학교 학사
수상 : 1962년 대한민국문화포장  1964년 대한민국문화훈장 국민장
출처 네이버 백과



우리가 간송 전형필 이었다면? 내가 간송 전형필 이었다면?

숭고한 헌신과 마음으로 살아있는 역사를 만들어 내셨다.
끝까지 이어가고자 했던 자부심이 오래도록 국민들에게 전해지길 바라는 마음이다.
국민 모두의 관심과 국가의 적극적인 지원이 필요한 이유이다.



익산참여연대 책익는 마을는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공간

 


다음일정
일시 및 장소 2020년 7월 8일(수) 저녁 7시, 남중동 커피플라워

선정도서 경제학자의 인문학 서재 (경제학은 세상과 어떻게 연결되는가)
저자 박정호 출판사 더퀘스트
문의 익산참여연대 063.841-3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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