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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예끼 순 호랭이가 꽉 깨물어 갈 년’ 이었다. [글 김광심 회원]

나는 예끼 순 호랭이가 꽉 깨물어 갈 년이었다.

김광심 회원

 

거의 날마다 참 거리 싸서 목포 나일론 극장에 나를 데리고 가시던 외할머니께서 평소 하시는 말씀의 반은 판소리 사설이었다. 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판소리 다섯 바탕 완창발표를 한 딸 덕분에 23년 동안 수 백 번 판소리 들으며 저 소리도 이 소리도 외할머니에게 들었던 말인데 싶어 요즘도 혼자 웃다가 그리움에 사무쳐 눈가에 눈물이 맺히기도 한다.

그 중에서도 자주 들었던 말은

저 저 저 호랭이가 꽉 깨물어 갈 년! ~ ” 그 년(?)을 호랭이가 물어 갔으니 더 이상 궂은 말을 할 필요가 없으셨던 것일까? 왜 호랭이가 꽉 물어갈 년인지에 대한 설명은 없으시고 딱 거기까지셨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외할머니께서 그렇게 말씀하셔도 한 번도 왜 그러냐고 물어보시거나 화를 내시는 분은 없으셨고 나 역시 저 저 저 호랭이가 꽉 깨물어 갈 년! ~이었는데 한 번도 그 소리가 싫지 않고 정겨웠던 이유는 잘못한 행동에 대한 뒷소리 잔소리가 없으시니 자존감이 상하지 않았던 이유는 호랭이한테 물려 간다는 상상만으로도 오금이 저려 호랭이에게 물려가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 나를 똑똑하고 착하다고 자랑해 주시니 내가 아주 좋은 사람으로 느껴져서 더 좋았다. 그러던 어느 여름날 머리를 감고 있는데 저 저 저 호랭이가 꽉 깨물어 갈 년! ~ ”이라고 하시는 것이었다. 그 날은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이유를 알 수 없어 내가 왜 호랭이가 꽉 물어 갈 년 이예요? ” 라고 여쭈었다. “비누를 너무 많이 쓰니 거품이 많이 나고 그 거품을 없애려니 물이 많이 들어가잖아 꼭 필요한 만큼만 써야지 그란게 호랭이가 꽉 물어 갈 년이지. 라고 말씀하셨다. ~ 그랬구나. 그 시절 이미 환경 운동(?)을 하셨던 외할머니 덕분에 나는 요즘도 새로 샴푸를 사면 얼마만큼의 양이 필요한지 여러 차례 계량해서 꼭 필요한 만큼만 사용한다, 호랭이가 나를 꽉 물어 가면 안 되니까.

호랭이가 꽉 깨물어 갈 년! ~ 이라는 말이 욕 같지만, 아니 욕이지만~ 이 소리가 심청가에서 뺑덕어멈이 황성 맹인잔치를 가던 중 심 봉사를 주막에 버리고 젊은 황봉사와 도망을 가 버린 이른 아침 심 봉사가 분하고 무섭고 슬프고 서러운 마음을 담아 예끼 순 호랭이가 꽉 깨물어 갈 년!”이라고 장탄식을 하며 땅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워라 워라 워라 현철허고 얌전한 우리 곽 씨 부인 죽는 양도 보고 살았고, 출천대효 내 딸 심청 물에 빠져 죽는 양도 보고 살았는 디 내가 다시 니 년을 생각하면 인사불성의 쇠 아들놈이다. 이년! 막 담을 덜컥 지어 놓고황성 길을 올라가며 그래도 생각이 나서 주절거린다, ” 눈 뜬 가장 배반키도 사람치고는 못할 틴 디 눈 어둔 날 버리고 니가 무엇이 잘 될 쏘냐? 새 서방 따라서 잘 가거라.”~ 라는 대목에서 나오는 소리라는 것을 안다면, 뺑덕어멈의 못된 행동을 안다면 영물인 호랭이가 그 들을(뺑덕어멈과 황봉사)잡아가서 사람으로 만들어 주길 바라는 마음과 잘 가서 잘 살아라. 라는 마음이 담긴 이 소리를 어찌 욕이라고만 할 수 있으랴? 라는 생각을 한다. 욕이 안 되려면 자를 빼야 하나?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중에도 외할머니의 그 소리가 그립다.

외할머니의 유전자 때문일까? 나는 평생 동안 수시로 저 저 저 호랭이가 꽉 깨물어 갈 년!~”을 만난다. 어렸을 적 할머니에게 들었던 기준으로 말하자면 목욕탕에서 때를 밀면서 대야에 발을 담그고 수돗물을 계속 틀어 놓은 ~,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비누 거품이 넘치도록 사용하는 ~, 등 많아도 너무 많다. 그러던 어느 날 화를 내야 하는 상황인데 호흡이 발끝으로 도는 찰나에 화까지도 발끝으로 가라앉아버렸는지 호흡과 화가 끈끈하게 어우러져 눈물이 맺히더니 그만 주르르 흘러내리게 만든 이를 만났다. 심 봉사는 땅바닥에 주저앉았는데 나는 방바닥에 쓰러져 웅얼거렸다. “예끼 순 호랭이가 꽉 깨물어 갈 년!” “워라워라 워라워라 나를 끔찍이 아끼고 사랑해 주시던 아버지께서 내 나이 열아홉에 돌아가신 것을 보고도 살았고, 건강하고 똑똑한 내 아들처럼 든든했던 막내 동생이 서른아홉 나이에 죽는 양도 보고 살았는디 내가 다시 네 년을 생각하면 인사불성의 쇠 아들 년이다. 막 담을 덜컥 지어 놓고겨우 일어나 하던 일을 하다 그래도 생각이 나서 주절거린다. 생판 모르는 사람 배반키도 사람치고는 못할 틴 디, 많은 정성과 사랑을 쏟았던 날 버리고 니가 무엇이 잘 될쏘냐? ~~ 잘 가거라. 잘 살아라.”~

내가 왜 호랭이가 꽉 깨물어 갈 년이냐?” 고 물어보면, 아니 묻지 않아도 몰라서 그런 것이라면 알려 주어야겠지만, 뻔히 알면서 그런 행동을 반복하는 사람에게는 말을 아껴야한다. 말을 섞을수록 나에게 우리에게 상처가 될 터이니 누군가가 물어도 입을 다물어야한다. 여섯 살 때도 내가 왜 호랭이가 꽉 물어갈 년인 줄 알았는데 설마 몰라서 그랬을까? 내가 어쩌지 않아도 영물인 호랭이가 알아서 손(?)을 봐 주면 그 때가 언제일지 모르지만 그 날 그 오늘 그 순간에 그 사람이 찾아 와 그 날의 잘못을 시시콜콜 말하지 않더라도 나를 보고 환하게 웃어 주면 염화시중의 미소가 가 내 입가에 머무는 기쁨을 맛보게 될 것이고, 외할머니의 칭찬이 덤으로 쌓여 내가 하늘나라로 가면 아이고 내 새끼 잘 했어.” 라고 내 엉덩이를 도닥여 주시며 외할머니의 보물창고인 항아리 속에 지푸라기를 깔고 모셔 놓은 주황색으로 잘 익은 커다란 감을 꺼내어 한 수저 듬뿍 떠 제 입에 넣어 주시고 환하게 웃어 주실 텐데 그 이상 무얼 더 바라랴. 싶다.

 그런 심정을 담아 기획했던 공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