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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싶다. 또 보고 싶다.

 

 



보고 싶다. 또 보고 싶다.




"40년 넘게 봉제공장 시다로 일한 어머니의 삶에서 영감을 얻었다."

한국 최초로 베니스 비엔날레 은자상 수상작가 임흥순의 소감은 이렇게 이어진다."어머니와 여동생과 같이 가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살아오신 많은 여성 노동자들에 대한 헌시이다."



나의 큰언니도 방적공장에서 30년을 일한 노동자였고 큰오빠도 허리가 굽을 정도의 노동강도가 센 석가공 노동자로 33년을 일했다.



우리 아이들을 5월에 낳아서일까? 누구보다도 5월을 좋아했다. 연초록빛 잎새의 간지럼이 있는 5월이 가슴을 뛰게 했다. 그런데 이제는 가슴 아린 5월이 되었다.



나의 삶의 표본처럼 살았던 큰언니와 큰오빠의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가난한 집 2남 4녀의 맏이로 태어났으니 배고픔이 늘 따라 다녔다. 산과 들로 냇가로 뛰어 다니며 칡도 뜯어 먹고 장구도 먹고 머루도 먹어가며 허기진 배를 채웠다.



이웃에게 한 없이 인자하고 자녀들에게 한 없이 호랑이 같으신 아버지의 훈육은 매섭고 무서웠다. 큰언니와 큰오빠에게도 꿈이 있었을 것이다. 스스로 포기하고 단념했을 꿈들...

"아버지! 공납금 학교에서 오늘까지 가져 오래요."
"손 교장이 내 아는 사람이니까 걍 가그라."
다그치는 아버지의 말에 말문을 닫고 고무신 밑창을 흙에 문지르다 무겁게 짐을 싼 듯 송산다리를 넘어 학교로 걸어갔을 큰언니와 큰오빠의 뒷모습이 잡힐 듯하다.



동네 궂은일 다 찾아 바깥으로만 돌아 다니는 아버지 덕에 지게를 지고 큰언니와 큰오빠는 아버지 대신 종종 땔감나무 하러 산에 올라갔다. 나무 짐을 한 가득씩 하는 폼도 서로 달랐다. 큰언니는 무조건 많이많이 큰오빠는 나란히 나란히 쌓아가며 묶었으며 큰언니는 한시도 배고픔을 못 참았고 큰오빠는 배고픔을 잘 참았다. 못 참는 큰언니는 어머니의 잔소리 세례를 길게 받았다. 셈도 곧 잘하는 총기가 밝은 큰언니와 큰오빠는 국민학교 3학년과 국민학교 졸업을 끝으로 배움을 접었다.



가르칠 의지가 없으신 무기력한 부모님은 일찍부터 타지로 내 보낼 궁리를 하셨다. 농촌에 수입원이 없던 그 시절인지라 우리 집 뿐 아니라 다들 그렇게 자식들을 도시로 보내고 있었다. 큰언니는 충남에 있는 방적공장으로 떠났고 큰오빠는 황등에 석가공 공장 연수생으로 떠나게 되었다.



큰딸로 큰아들로 태어난 것이 늘 짐짝처럼 여겨졌을 그것을 큰언니와 큰오빠는 운명처럼 받아들이고 부모님께 싫은 내색 없이 매달 동생들의 옷이며 분유며 약간의 생활비를 보내 왔다.



큰언니는 박봉에도 불구하고 하물며 작은집 사촌동생들의 의류며 학용품을 사서 보내왔다.월급 타서 동생들의 옷을 사는 즐거움에 몇 날 며칠이 기뻤고 사놓고 줄 날을 기다리며 또 잠을 설치기도 했다. 큰언니로 인하여 우린 새 옷으로 갈아입고 동네 한 바퀴 돌고 때가 새까맣게 반질반질 윤이 날 때까지 자랑삼아 입고 학교에 다녔다. 큰 오빠는 문짝 달린 흑백TV를 우리 집에 들여와 우리의 문화의 창을 넓혀 주었다. 옆집으로 건너가 목소리 죽여 가면서 "텔레비전 좀 보여주시면 안 될까요?"더 이상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옆집 아이에게 힘이 들어갔다.
"우리 집에 텔레비전 보러 와라."



우리 고향에 구절재가 있다. 99고개의 모퉁이가 있어서 부쳐진 이름이다. 우리 큰언니와 큰오빠는 어쩜 우리가 모르는 세상에서 99고개 모퉁이를 돌고 돌아 큰 나무처럼 서 있는 듯 대하기가 늘 어려운 언니 오빠였다.



작은 점들이 모여 하나의 선이 그어지듯 큰언니의 결혼으로 또 다른 선이 이어졌다. "난 23살에 결혼할 거야"그 말대로 해남 총각과 결혼을 했다. 1년 후에 큰오빠도 서울 아가씨와 결혼했고 모든 것이 물 흐르듯이 흘러가고 있었다. 조카들의 재롱에 나이 드신 부모님이 빙그레 웃으셨다.

집안 형편도 어느 정도 나아졌다. 우리들도 스스로 살아가는 법을 배워 가며 부모님의 짐을 덜어 드리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세상의 모든 시계가 멈추는 듯 슬픔이 우리 집의 문을 두드렸다.



큰 형부께서 갑작스럽게 돌아 가셨다.

큰언니는 빚을 내어 큰형부의 밀린 병원비를 갚고서 3남매와 시어머니의 생계를 걱정해야만 했다.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멈추었다."악착같이 살아야 삼남매를 걷을 수 있다. 이젠 더 이상 눈물을 보이지 않겠어!" 좁은 어깨가 들썩였다. 막내아들의 돌이 갓 지난 때였다. 그길로 방적공장에 취직해 25년을 그렇게 열심히 살았다. 국가에서 주는 해택도 뿌리치고 아이들을 홀로 키워냈다. 큰 아이 중학교 입학하기 전에 단독주택 장만의 꿈을 이루기 위해 부단히 경주했다.



큰 언니의 하루는 24시간이 아닌 48시간이었다. 큰 딸 중학교 입학기 전에 드디어 단독주택을 꿈을 이루었다. 새집에 입주하여 방들을 청소하며 생의 성취감을 이야기하며 한껏 들떠 있었다. 자기 몸이 부셔져도 아이들은 가르쳐야 한다면서 열심히 걷고 뛰고 날며 봄날을 맞이했다.



서서히 아이들의 공부에 결과가 나오기 시작했다. 모두 함께 웃고 크게 감사했다.



큰언니는 가냘픈 몸이 지탱하지 못 할 만큼 살았다. 그래서 일까? 몸에 이상이 나타났다. 항문암 말기의 선고가 내려졌다. 큰언니는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고 기도했다. 기적이다.나았다.

"언니 재혼을 왜 안 했어"
"응 난 큰딸인데 너희들 결혼하는 데에 지장이 있으면 안 되잖아?" 언니는 강건하게 우리 곁에 서 있었다. 나는 종종 네 자매가 마음을 모아서 가까운 곳부터 여행을 떠나는 데 첫째 언니는 경비를 담당하고 둘째 언니는 흥이 많으니 분위기를 띄워주고 넷째 언니는 운전을 잘 하니까 운전을 맡고 셋째인 나는 사진 찍기를 좋아하니 사진을 맡아야지 생각만 해도 즐거웠다. 우리의 노년이 그런 노년이리라 상상만으로 가슴이 뛰었다.



큰오빠의 가정에 큰 슬픔이 폭풍우가 되어 쏟아졌다. 큰오빠의 큰 딸을 교통사고로 잃었다. 내 몸의 무엇이 빠져나간 듯 슬픔에서 허우적거렸다. 그 아이는 세상에서 처음으로 정이라는 것을 알게 된 자식과 같은 소중한 아이였다.



자식 잃은 큰오빠의 마음은 갈기갈기 찢어지고 난파되어 섬에 고립된 듯 죽지 못해 사는 날이 계속 되었다. 슬픔에 슬픔을 덮었다.

성치 못한 큰언니는 하나님께 마음이 아픈 오빠를 위해 기도했다. 새벽마다 울며 기도했다.큰 언니의 몸에 세 번째 암이 어둡게 내려앉았다.



큰오빠가 세상을 떠났다. 하나님께 원망을 퍼부었다."왜 우리 형제들에게만 고통을 주시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2013년 5월 17일 큰언니 나이 57세 암 투병 6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인생이 답이 있을까? 없다. 내가 내린 결론이다.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있을 수 있는 것 그것이 최고의 행복이며 따뜻한 마음으로 부모와 형제를 응대할 때 자기도 행복해진다는 것을 큰언니와 큰오빠가 우리에게 보여 주었다.



2014년 10월 22일 큰언니의 둘째 딸 서연이가 새 생명을 낳았다. 이름은 이 혜나.손녀 딸 혜나를 볼 때마다 큰 언니의 유언이 생각난다.

"나 대신 우리 아이들도 자식처럼 여겨서 잘 해줄 거지 서연이 아기 낳으면 자주자주 가 주고 그렇게 할 거지"
"응 그렇게 할께"
언니가 떠난지 두 번째의 오월이 왔고 지나가고 있다. 방긋방긋 웃는 손녀 딸 혜나의 모습에 언니의 얼굴이 스친다. 보고 싶다. 또 보고 싶다.

 

 

글 김선이 (익산참여연대 회원)
 
- 이글은 익산참여연대 소식지 참여와 자치 71호 회원글에 실린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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