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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미혜 회원을 소개합니다.

 

 

 

 



[회원소개]  허미혜
회원



2015년 8월 아침부터 뜨거운 어느날 허미혜 회원님을 만나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몇 번의 약속을 펑크 내고 하는 인터뷰라서 그런지 무척이나 죄송스러웠지만 그래도 회원님께서는 흔쾌히 인터뷰에 적극적으로 임해주셔서 너무 감사했다. 허미혜 회원님은 현재 참여연대에서 천연화장품 만들기(여인의 향기) 선생님으로 재능기부를 하고 계신분이시다. 
 

고향이 익산이세요?
아니요. 고향은 전주에요 처음부터 익산에서 산건 아니구요. 전주에서 학교졸업하고 직장을 다니다가 신랑 직장이 천안이라서 천안에서 생활하다가 익산으로 정착하게 되었어요. 익산에 온지 거의 20년 정도 되었네요.



결혼은 어떻게 하셨어요?

당시 23살이었는데 중매로 만났어요. 나이차이가 있는데도 친정아빠와 엄마가 저보다도 신랑을 더 좋아했어요. 신랑을 너무 괜찮게 생각했지요. 특히 신랑이 아빠 닮았다고 엄마가 더 좋아했어요. 부모님은 다른 건 안보고 신랑의 세심함, 변함없는 마음 책임감 있는 모습을 가진 부분을 더 중요시 했었어요. 그래서 부모님은 집안 환경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신랑의 인품을 보고 흔쾌히 허락을 했어요. 그런데 처음에 나이 차이도 있고 결혼생각이 별로 없던 나에게는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그런데 신랑을 만나는 시간이 늘수록 편안하더라구요. 그러면서 내가 저 사람을 놓치면 저사람 보다 더 좋은 사람을 못 만날 것 같아서 결혼하게 되었어요.^^  



그럼 익산에는 어떻게 정착을 하게 되셨나요?

남편도 고향이 전주인데요. 당시 직장이 천안이었기 때문에 결혼하기까지 천안에서 생활하다가 이러저러하게 직장 때문에 남편이 고생을 좀 했죠. 전주나 익산으로 고민을 하던중 친구의 일(책제본 사업)을 같이 하게 돼서 익산에 정착하게 되었어요.



그러면 슬하에 자녀는 어떻게 되세요?

딸 하나만 낳았어요. 그 당시에는 맞벌이를 하다 보니 자식에 대한 욕심이 별로 없었어요. ‘애하나 잘 키워서 재미있게 살자’ 주의였어요. 그래서 하나만 낳게 되었구요. 딸도 궂이 동생을 원하지 않았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사후에 딸 혼자 있을 것을 생각하면 후회를 하게 되네요. 지금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서.....



그러면 딸아이 하나라서 귀하게 키웠을 것 같은데요?

아니요 교육을 함에 있어서 약간 엄하게 키웠던 것 같아요. 딸이 하나이기 때문에 버릇이 없을 까봐서 아빠는 딸아이가 해달라는 것은 다 해주지는 않았어요. 나는 엄마로서 아빠의 눈치를 보면서 딸아이를 조심스럽게 키웠던 것 같은데 아빠는 독립할 수 있는 자립심을 키워주는 것이 방침이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인지 소심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집에서 생활하는 것과 밖에서의 생활이 좀 다르더라구요 밖에서는 너무 좋다는 평을 받는답니다. 스스로의 완벽함을 추구한다고 할까요. 직장에서의 평이 너무 좋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딸하나지만 잘키웠다는 생각을 한답니다.



그러면 남편분은 어떤 분이세요?

나이 차이가 나긴 하지만 엄청 자상하고 인자해요. 저를 많이 사랑해주고 가정적이고 책임감 있는 사람이에요. 특히나 산을 너무나 좋아하는 사람이에요. 산을 정말로 좋아해서 쉬는 날은 거의 산에를 다녔어요. 지금도 산 다니는 것을 무척 좋아해요. 산사나이라고나 할까요?^^ 남편은 머리를 길게 기르고 사는 정말 멋있는 사람이에요.
우리 딸이 하는 말이 ‘아빠같은 사람만 있으면 시집을 가겠다’고 하더라구요. 그정도로 성격도 좋고 가정적인 사람이랍니다.



그러면 일을 결혼해서도 계속하신건가요?

네 결혼해서도 일을 계속 다녔어요. 아이를 잠깐 시어머님이 봐주신적도 있는데 4살때부터는 일터에 데리고 다니면서 일을 했어요.(그때 많이 고생을 좀 했죠^^) 시어머니가 계셨지만 시어머니 그늘에서 아이를 키우지 못해서 직장다닐 때도 아이를 데리고 다닐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요. 그래도 직장동료들이 아이를 데리고 다니는 것에 대해 많은 배려를 해주었지요. 그런데 그때가 아이한테 많이 미안했어요. 지금도 그렇구요.



그럼 시어머니와는 언제부터 생활을 하게 되었던 건가요?

시동생이 결혼하고 모셨는데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우리가 모시게 되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병환이 나서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었는데 그후 내려오시지 않았어요. 그당시 저는 남편하고 떨어져 살았는데 남편은 대구에서 생활하고 나는 천안에서 생활을 하고 있었어요.
남편의 건강 때문에 대구생활을 접고 익산에 오면서 남편과 함께 생활을 하게 되었고, 어머니가 내려오시게 되었어요. 그때 딸아이가 초등 2학년 때였지요. 그당시 익산에서 자리를 잡지 못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약간 어려움이 있었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서 시어머니를 모시게 되었어요. 아쉬운점은 내가 정말로 힘들 때 아이를 조금만 봐주셨으면 좋았을텐데 그러지 못한 것이 좀 서운한 점이라고나 할까요? 그런데 어머님이 참 좋으신분이세요. 88세인데 집 안밖에 일을 참 잘하세요. 걱정이 되는건 허리도 안좋으신데 일을 많이 하면 더 많이 아플까봐 걱정이에요.^^ 내가 사랑하는 신랑의 엄마니까 더 좋아하게 돼요.^^



그럼 남편분은 종이 재단일은 언제부터 하신건가요?

남편은 종이재단일을 처음부터 했었어요. 근데 이 일이 많이 힘든 직업이더라구요. 하루종일 서서 해야 하는 일이라서 그런지 신랑이 몸이 많이 좋지 않았어요. 쉬는 날이 많이 생겨서 인지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게 되었지요. 그당시 직장은 천안이고 집은 온양이라서 힘들게 일을 했어요. 그후 신랑이 대구로 직장을 옮기게 되었어요.
친구중에 익산에서 책재단하는 친구가 있는데 사업을 같이 하자는 제안을 받고 익산에 오면서  책 재단 사업을 같이 했구요 그후에 이 사업체를 인수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지금까지 책 재단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천연화장품 만드는 일은 언제부터 하셨어요?
몇 년전에 지금 생활하는 것 이외에 잘하는 것이 없는 것 같아서 시에서 운영하는 여성일자리에서 천연화장품 강좌를 열었는데 더 나이 들기 전에 어떤 자격증이라도 따고 싶었어요. 그래서 시작을 했구요. 두 번째는 신랑이 머리를 기르다 보니 머리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없더라구요. 신랑이 탈모가 있어서 한방샴푸로 해주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시작하게 되었어요.
처음에는 욕심없이 시작을 했는데 천연화장품을 써보니까 너무 좋더라구요. 많은 사람들이 만들어서 썼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물론 경제적인 부분도 조금은 도움이 되고자 시작을 하게 되었어요.

 

 

                                    - 참여연대 여인의 향기 활동 모습 -

 


그러면 천연화장품 매장을 하고 계신건가요?

아니요 저는 직업이 따로 있어요. 10년째 손해보험 일을 하고 있어요. 손해보험일은 경력이 많아서 인지 내가 활용할 수 있는 시간이 나더라구요. 천연화장품은 겸업이라고 해야 할까요. 특별히 매장을 내서 하는 것이 아니라 고객이 원할 때 시간날때마다 하는 일이라 시간에 많이 투자를 하지 않아도 되더라구요. 그래서 너무 좋아요.



현재 참여연대에서 재능기부를 하고 계시잖아요. 계기가 뭔가요?

내가 써보니 너무 좋아서 같이 나누고 싶은 마음에서 기부활동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어요. 제가 많은 단체 활동을 하지 않아서 참여연대에 ‘배운것을 함께 나눌수 있다면 좋겠다’라고 제안을 했지요. 그래서 지금의 기부활동을 하게 되게 됐어요. 이후에도 이런계기가 있다면 참여연대 뿐만아니라 저의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곳이 있다면 어디든지 계속하고 싶은 욕심이 있습니다.



참여연대에서 천연화장품(여인의 향기) 수업을 해보니 어떠세요?

처음에는 뭐든지 다 어렵잖아요. 약간은 어색하고 낯선 것은 있지만 그래도 함께 한다는 것이 중요한 것 같아요. 여인의향기에 참여하신 분들이 굉장히 매력을 느끼는 것 같더라구요. 참 좋은 시간인 것 같아요. 참여하시는 시간내내 다들 기대하는 마음이 큰 것 같아요. 기대하는 만큼 어긋나지 않아야 하는데 최선을 다해 열심히 하고 싶어요. 그리고 이렇게 함께 좋은 천연화장품을 만들어서 많은 분들과 함께 쓸 수 있는 시간이 있는 것이 무척 좋고 보람이 있어요.



천연화장품 만들면서 애로사항은 없으셨어요?

처음에는 스킨하고 로션, 수분크림만 하려고 했어요. 간단하게 생각을 했지요. 그런데 찾는 분들이 늘어나고 가짓수도 늘어나게 되더라구요. 그렇게 되니 자연스럽게 스스로 공부를 하게 되고 내 스스로의 레시피가 만들어지게 되더라구요. 이 계기가 저한테도 많은 공부를 하게 만들어 주었어요. 뭐든지 그렇잖아요. 내가 생각한 것만 가지고는 안되잖아요. 어쨌든 이것도 서비스사업인지라 원하는 분이 많으면 거기에 맞추어서 가야하는 뭐 그런거 같아요. 그래서 지금은 만드는 제가 만들 수 있는 상품이 많아졌고 공부도 더 많이 하게 되고 일거양득이라고 할까요. 저도 많이 배우고 있답니다.   



참여연대는 어떻게 가입을 하게 되셨는지요?

초창기 산악회(현재는 갈숲산악회)때 활동했어요. 남편은 워낙에 산행을 좋아해서 가입하게 되었구요 저는 사람을 사귀고 싶어서 남편과 함께 가입을 했지요. 예전에는(허리 수술전까지) 참여연대 일일주점할 때 나름 도와주었는데 지금은 허리가 좋지 않아서 활동을 많이 못하고 있어요. 그래서 더 많이 미안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기회가 되어서 참여연대에서, 재능기부를 하게 되어서 참 좋아요.



그럼 현재까지도 산악회 활동을 하고 계신건가요?

남편이 예전에 참여연대 산악회에서 3년 정도 활동을 했어요. 현재는 익산시 산악연맹 부회장직을 맡고 있구요. 저는 산악회 활동에 참여를 못하고 있어요. 저는 사람이 좋아서 남편따라 산악회에 들어간거고 몸이 좋지 않아서 활동은 하지 않고 있어요. ▷ 그러면 지금까지 사시면서


그러면 지금까지 사시면서 앞으로의 인생관이 있으시다면?

지금까지 살아왔던 것처럼 내 자신을 믿고 열심히 산다는 것, 성실히 살다보면 언젠가는 좋은일이 있을 것이고, 후회는 없을 것 같아요. 저의 신조는 소신껏 열심히 즐겁게 살자입니다.



마지막으로 참여연대에 하고 싶으신 말씀이 있으시다면?

딱히 할 말이 없어요. 활동을 많이 하지 않아서인지 그리고 실무자분들이 너무 열심히 하시잖아요. 활동에 있어서 많이 하고 싶지만 내 몸이 많이 좋지 않아 활동을 많이 못해서 미안해요. 그래서 건강을 챙겨야 활동도 하는 것 아닌가요? 건강을 돌보면서 활동을 하고 싶어요. 그리고 앞으로도 내가 봉사활동을 많이 하고 싶고 어디를 막론하고 저의 기부기부를 하고 싶은 생각이 있습니다. 
  

수업때도 항상 밝게 웃는 얼굴로 대해주시고 화장품에 대해서 열정적으로 가르쳐 주시는 모습을 보면서 어떤 분이실까 참 궁금했다. 그런데 그런 궁금증이 나를 무척이나 무심케 했던 시간이 아니었나 생각이 든다. 천연화장품 만드는 일에 대한 자부심이 굉장히 높고 자신의 하는 일에 대한 열의와 열정이 남다르고 작은 것 하나라도 진심어린 마음이 전해지는 시간이었다.

회원님은 지금도 시간이 날 때마다 남편분이 하는 운영하는 책 재단 일도 함께 도와준다고 하셨다. 본인의 몸도 좋지 않으면서 사랑하는 남편의 일까지 하시느라 무척 힘들 것 같았지만 너무나 행복해 보였다. 
 

글 류귀윤 (익산참여연대 운영위원)

 
- 이 글은 참여와자치 소식지 72호 회원과의 만남에 실린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