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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과의 만남 [박영호 회원]

근로자가 살아야 가정이 살고, 생태계가 건강해야 사람도 건강합니다.“ 노조활동 30, 환경운동 20, )전국택시 산업노조 익산지부장, 익산환경운동연합 집행위원, 강살리기네트워크 운영위원장.

이번 소식지 인터뷰 회원은 택시 운전사 박영오 회원입니다.

                                                                                            

인터뷰 전문 기자의 명언 중에 "인터뷰는 운전이다"라는 말을 본 적이 있다. 아무리 훌륭한 인터뷰 대상자(interviewee)를 섭외해도 인터뷰를 제대로 하지 못하면 최고급차를 타고 방향지시등도 제대로 켜지 못하는 격이라는... 이번 소식지 인터뷰는... 최고급 자동차에 키(Key)나 제대로 꽂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박영오 회원은 35년 경력의 택시 운전사다.

 노조활동 하던 때가 그립고 아쉽다

서른 살에 택시 운전을 시작해서 회사택시와 개인택시를 35년 간 몰았습니다. 처음부터 택시를 하려고 한 건 아니고 택시 면허 없이도 운행할 수 있던 시절 야간에 용돈벌이로 시작했던 것이 택시 노조 활동을 하는 회사 동료와 친해지면서 본업이 되었습니다. 노조활동을 하다 보니 사측의 불합리한 것들에 대해 알게 되었고 동료들의 대변자 역할을 하면서 본격적인 노조활동과 택시 운전을 하게 되었습니다. 80년대 노조설립이 왕성하던 시절 맘에 맞는 몇몇 동료들과 함께 힘들지만 애착을 가지고 활동 했던 때가 생각나네요.(30년 전 노조활동 하던 동료들의 얘기가 1시간 가까이 이어졌다)

 기억에 남는 노조활동들...”

도급제 방식의 근로계약에서 사납금을 내고 나면 최저임금도 보장받지 못하던 때 택시기사 최저임금법 적용입법 국회 상경 투쟁 활동을 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국회를 통과했지만 회사측이 최저임금법을 피하기 위한 꼼수를 부렸습니다. 우려했던 것이 현실이 되면서 지리한 법적 싸움이 계속되었습니다. 실제 운행시간은 변한 게 없는데 회사가 취업규칙을 바꿔 근로시간을 단축하는 편법으로 고정급 총액을 낮춰버렸습니다. 결국 힘겨운 소송 과정을 거쳐 2019년 대법원에서 근로자들의 손을 들어줬습니다. 실제로 대법원 판결에서 최저임금 미지급금 차액 지급 소송에 패소한 익산의 법인 택시 회사 한 곳이 밀린 임금을 감당하지 못하고 최근 패업이 되기도 했습니다.(현재 익산의 법인택시는 11450여대, 개인택시 1,000여대가 운행 중이라고 합니다.)

 가정이 편안해야 나라가 산다 = 진리

택시 기사 중에는 정말 다양한 일들을 하다 온 사람들이 많습니다. 대기업 퇴직자, 퇴직 후 노후자금 마련, 사업에 실패한 사람, 보증문제에 얽혀 경제활동을 할 수 없는 사람 등 택시운전을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오는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형편이 어려운 기사들이 좌우 돌아볼 겨를 없이 죽도록 앞만 보고 일하다가 건강을 해치거나 사고가 나서 가정이 해체되거나 더 어려워지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택시는 사람을 피해 다니는 게 아니고 사람을 좆아 다니는 일이라 사고가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돈을 벌기위해 택시운전을 시작 했는데 되레 더 힘들어지는 경우를 보면 많이 안타까워요. 가정이 힘들면 회사일이 잘 될 수 없습니다. 가정의 평안이 나라의 평안이라고 생각합니다.

 익산의 택시 정책, 변화가 필요한 부분이 있다면? ”

내가 오래 전부터 요구해서 현재 시행 중인 행복콜택시 사업은 더 확대되어야 합니다. 익산의 버스 노선이나 보조금 지원책과도 맞물려 있습니다. 직선거리로 10여분이면 갈 거리를 30분 넘게 우회하는 버스 노선이나 농촌지역의 배차시간에 대한 불편은 모두가 알고 있지만 쉽게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택시는 콜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고 버스에 비해 기동성이나 연비 등을 따져보면 효율성이 높습니다. 또 호남권 교통의 중심지인 익산에 (택시)교통안전공단을 유치하면 좋겠습니다. 현재 택시면허 취득을 위해서는 경기도 화성이나 경상도 상주까지 가야하는데, 익산에 유치하면 충청 호남 지역 사람들이 편리하고 익산 경제에도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익산시에서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노력했으면 좋겠습니다.

 “35년 세월 흐르는 동안 도로는 반듯해지고 인심은 많이 굽었다

택시 처음 시작할 때는 먼 길 갔다 돌아올 때 빈차로 오는 일이 거의 없었습니다. 차편이 여의치 않아 밤길을 걸어가거나 짐을 들고 가는 사람이 있으면 택시비 받지 않고 그냥 태워주는 게 다반사였으니까요. 지금은 밤길을 걷거나 짐을 들고 걷는 사람도 많지 않지만, 빈차로 나오다가 태워준 사람이 가벼운 접촉 사고가 났는데 과도한 피해보상을 요구하는 일을 겪은 이후로 그런 일도 없어졌습니다. 인심이 점점 각박해진 것 같아 아쉽습니다.

사람 만나는 게 좋아, 생활비 한번 제대로 갖다 주지 못한 것, 아내에게 너무 미안

사실 나는 결혼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지금의 아내는 맞선을 한번 보고나서 헤어졌다가 6개월 후 다시 만나 결혼했습니다. 지금까지 택시로 번 수입은 노동운동과 사람 만나는 일에 다 쓰고 생활비를 집에 갖다 준 적이 없습니다. 아내에게 빵점 남편이죠.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아내에게 참 고맙고 감사한데 아내도 그렇게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하하) 어렵게 살림을 꾸려나가면서 아들 둘을 키우며 애쓴 아내에게 항상 미안하고 고마울 뿐입니다.

 어릴 적 친구들과 멱 감고 물고기 잡던 도랑이 그리워 시작한 환경운동

물에 대해 관심이 많았습니다. 물은 참 흔한 듯 하지만 정말 소중한 것 중 하나인데 너무 쉽게 생각하는 바람에 부족하고 오염되고 낭비되는 것 같습니다. 엄마 배속 양수에서 자라고 태어나서 결국 죽어서 물로 돌아가 듯 물은 우리 삶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소중한 존재입니다. 자연을 살리고 돌본다는 것은 후대를 위한 최소한의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익산의 환경문제도 심각하잖아요~ 선조에게 물려받은 환경을 그대로 물려주는 것이 환경운동에 기본이라고 생각해요.

기억에 남는 활동, 빗물 저금통과 마을 도랑 살리기

빗물의 활용은 무궁무진합니다. 유치원과 초등학교에 빗물 저금통을 설치해 주었던 일과 옛도랑 복원 사업으로 금마 황각천 살리기가 기억에 남습니다. 황각천 살리기는 물을 중심으로 한 주민참여와 거버넌스의 모범사례가 되어 전국에서 선진지 견학 오는 곳이 되었습니다. 유명한 바위가 있고 이야기 거리가 풍부한 황각천을 주민들의 도랑으로 되돌려 주어 참 뿌듯했습니다. 지금 생각으로는 내가 몸을 움직일 수 있는 한 환경운동은 멈추지 않을 것 같습니다.

 우리 익산은 어떤 도시이고 어떻게 변해야 할까?“

옛 이리는 생산의 도시이면서 교통이 발달해 소비도 왕성한 생산과 소비의 도시였습니다. 지금은 대중교통뿐 아니라 개인 이동수단이 발달해서 상대적으로 교통의 도시 이미지도 흐릿해졌습니다. 인구유출을 막고 문화의 도시, 소비의 도시 조성을 위한 계획이 필요합니다. 익산의 특성을 잘 살려 구경철서 건물을 활용한 세계 다문화센터를 만들기는 어떻습니까? 주말마다 익산으로 몰려오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문화와 먹거리를 해결하고 중앙동 문화의 거리에 세계 음식의 거리를 만드는 것도 좋은 방법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전국의 외국인(노동자)들이 고향의 음식을 맛보기 위해 KTX 타고 익산을 찾아오는 걸 상상해보세요. 잠깐 놀고 거쳐 가는 곳이 아니라 정주여건을 만들어줘야 합니다.(지금까지 인터뷰한 회원 중 박영호 회원과 비슷한 이야기를 한 분들이 몇 있었다는 사실은 안 비밀)

택시 손님이 참여연대에 대해 물어본다면 어떻게 소개해 주실까?“

거의 없는 일이지만 익산에 시민단체 활동할 수 있는 곳은 어떤 게 있나요?”라고 물어본 손님이 있었는데 환경운동연합과 익산참여연대를 말해주었습니다.(하하하) 시민과 함께 하는 단체, 익산의 문제를 시민들과 함께 해결하고 공유하는 단체라고 얘기해주고 114에 전화해서 (위치)물어보라고 했습니다.(, 개인적인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어 인터뷰 내용을 다 싣지는 못했지만, 택시 승객의 특성상 짧은 시간에 소개할 수 있는 굵직한 답변이라고 인정각).

 인터뷰의 질문이 내비게이션이라면 목적지라고 할 수 있는 인터뷰이의 삶과 정보를 제대로 담아내는 것을 기껏 소식지 지면 세 장에 담아내는 것은 나에게는 매번 편장막급(鞭長莫及)격이다. 인터뷰를 마치고 애써 기사를 탈고하고 나면 어떤 날 밤에는 가위에 눌리기도 하고 소식지를 발송하고 인터뷰 내용을 다시보고 있으면 몇 날 동안 양치하지 않고 손님을 맞이한 아침 같기도 하다.(그래서 참여연대 편집위원회에서는 소식지 편집위원을 언제든 환영합니다.^^) 박영오 회원을 인터뷰하고 나서 아직 가위에 눌리지는 않았다. 아침이 두렵기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