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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연대 이야기 마당

익산참여연대의 지속가능성

익산참여연대의 지속가능성


글 이영훈 (익산참여연대 지도위원)


창립 22주년을 지나는 익산참여연대는 지속 가능한가?라는 질문을 던져본다. 시민단체와 그 활동은 시대변화의 큰 격랑 속에서 어떻게 변하고 달라져야 할 것인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차에 개인적인 문제의식이나마 함께 고민해 봤으면 하는 마음이다.


우리를 둘러싼 변화는 어떤가.
알다시피 모든 게 빠르게 변하고 있다. 산업화 시대의 기간은 그 이전 시기를 합친 것보다 더 큰 변화를 이끌었다고 말한다. 인터넷 컴퓨터 시대는 산업화시대를 압도하고 다시 4차혁명을 시작한 지금은 가상현실과 우주시대를 거론할 만큼 거센 변화의 물결이 오고 있다. 그만큼 삶의 일상도 빠르게 변하고 있다. 적응하고 대응하지 못하면 삶의 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있다. (“넷플릭스를 보지 않는 삶의 질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좀 더 현실적인 문제로 접근해 보자. 서울과 수도권위주로 인프라가 구축되면서 지방이 위축되고 소멸되고 있다. 정부는 광역위주의 메카시티를 대안으로 제시했지만 전북과 익산은 제외되었다. 익산은 지속적으로 인구가 감소하면서 정부기관의 평가에 의하면 쇠퇴도시로 평가받고 있다. 얼마 전, 전국 생활임금 수준을 지자체단위로 평가한 결과도 전북이 가장 적은 임금을 받고 있고 그 중에서 익산이 가장 적게 받는다는 것이다.(한겨레신문참고) 일자리도 부족하지만 임금이나 복지도 그만큼 열악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사람은 떠나고 인구는 줄고 악순환이다. 주변의 변화는 이렇듯 우리 자신의 변화를 재촉하고 있다.


지속가능성이 한동안 화제가 되었다. 지속가능성이란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최소한의 생태계를 유지 관리하여 미래에도 존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의미한다. 경제와 환경은 물론 사회 전반에서 응용하고 있는데, 시민사회단체도 예외는 아니어서 심각하게 검토할 때가 아닌가 싶다. 우리는 지속가능한가?


알다시피, 시민운동은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 전교조 등 사회운동의 성장과 영향으로 90년대 들어 시작된 경실련, 참여연대 등이 대표적이다. 익산도 익산참여연대의 창립과 활동으로 본격적인 시민운동의 시작을 알렸다. 
비판과 견제 중심의 활동은 예산과 정책을 분석하고 대안을 만들어 제시하는 활동으로 확장되었다. 22년이 지난 지금, 많은 변화와 성장에도 불구하고 심각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 예견되는 상황을 미리 파악하고 준비해 미래를 대비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이는 미래의 지속가능성을 가늠하는 일이다.


시민단체는 활동주체와 운영진, 회원수와 참여정도, 중심사업과 방식, 지역사회에서의 위치와 네트워크, 재정 등 몇 가지 요소로 살펴볼 수 있다.


먼저 활동주체라 하면 목표와 역할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자신의 몫을 해내는 활동가?라 할 수 있다. 상근활동가와 운영위원, 연구회나 동아리 등의 각 단위에서 활동하는 회원까지를 망라해서 보면 된다. 보통 시민단체의 경우 회원 수의 10%정도가 평균치라 하니 우리도 그 정도가 아닐까? 보통 총회나 큰 행사에 참여하는 회원 수로 판단해도 그 정도다. 


중요한 것은 활동주체가 회원 수 증가에 비추어 꾸준히 증가하다가 어느 순간 정체되어 있다는 느낌이다. 물론, 코로나19로 인한 활동의 제약도 큰 이유가 되겠지만, 다른 이유를 찾으라면 사업의 분화와 역할 분담이 녹록치 않고 동아리나 연구회 등의 활력이 떨어지는 점이다. 사업을 여럿이 나눌 수 있을 정도로 역량이 준비되거나 능력있는 인력이 부족하다. 그러다 보니 소수 특히, 상근활동가들에게 일이 집중되고 있다. 
실무부터 사업까지, 소위 하나에서 열까지 상근활동가에게 과부하가 걸린 상태로 위태로울 정도다. 보통 이런 경우 선택과 집중을 통해 일의 효율을 높인다고 하지만 그마저도 한계가 있다. 단체 규모나 활동범위에 있어 최소한의 양이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지금은 상근활동가도 4명에서 3명으로 준 상태이기에 더 그렇다.


다른 측면에서 보면, 인구변화에서의 고령화와 같은 문제가 단체에도 제기된다. 20대로 시작한 상근활동가의 연배는 어느덧 50대가 되었다. 20대 자녀를 둔 중년층이 된 것이다. 오랜 고민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들과 함께 미래를 준비할 20대 30대 활동가의 양성은 요원하다. 소위 MZ세대로 불리는 젊은 층의 요구와 문화가 기성세대와 많이 다르다는 것도 있지만 이들을 받을 수 있는 단체안의 포용성도 고려해봐야 한다. 단적으로 임금과 복지도 예로 들 수 있다. 예전의 시민운동은 열정과 헌신이 기본이었고 많은 희생을 감수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의미있는 활동에 대한 자부심도 중요하지만 기본적인 생활이 가능해야 하고 좋은 직장이라 불릴만한 요소들을 갖춰야 한다. 그런 면에서 정부발표 수준의 생활임금은 보장할 수 있는 재정여력을 만들어 가야 한다.


단체활동의 전반을 검토하고 결정하는 운영위원회의 연배는 낮아졌다. 1세대라 불릴만한 이들이 5-60대가 되면서 물러나고, 지금은 40대 주축으로 2세대가 구축되어 활동하고 있다. 아쉬운 점은 2-30대의 참가다. 이들의 관심사나 요구에 대한 수용성을 높여 참여를 이끌어야 한다. 10-20년을 내다보는 새로운 변화와 대응은 이들로부터 나올 것이고 이들을 주축으로 만들어가야 한다. 


지속가능성이란 결국 내부로부터 힘을 만들어 준비하고 대응하는 것에서 나온다. 
유엔 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가 열리는 영국 글래스고에는 세계 정상들만 있는 게 아니다. 오히려 이들을 질타하는 10대 주축의 환경운동가들 수천 명이 있다. ‘미래를 위한 금요일’처럼 세계 곳곳의 수많은 ‘그레타 툰베리’들이 움직이고 있다. 세계는 행동하는 이들에 의해 만들어 진다. 익산참여연대의 지속가능성도 오늘 행동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 이글은 익산참여연대 소식지 참여와자치 96호 칼럼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