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회원마당

[연재] "미국의 사람"이었던 이승만, 결국 미국에 버림받다

"미국의 사람"이었던 이승만, 결국 미국에 버림받다

 

[한반도문제와 미국의 개입] 4월 혁명과 미국의 개입 (3)

이재봉 원광대학교 교수 

 

"미국의 사람"이었던 이승만, 결국 미국에 버림받다

 

4. 민중의 저항과 미국의 개입에 따른 이승만의 하야

1960년 3.15 부정선거로 마산에서 대규모 군중 데모가 일어나자 주한미국대사관은 미국 정부가 더욱 적극적으로 한국 사태에 개입할 것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4월 2일 매카노기 대사는 미국이 세계 다른 어느 곳보다 한국에서 능동적으로 대처해야 한다고 국무부에 건의했다. 미국은 한국의 현재와 미래에 중대한 책임을 지고 있으며, 한국은 미국의 "피와 돈"이 엄청나게 투자되고 안보가 심각하게 걸려 있는 곳이라는 이유였다.

 

4월 17일 매카노기는 한국 정세의 악화에 따라 "즉각적인 조치의 시급한 필요성"을 인식하고 국무부가 한국 정부에 압력을 가할 것을 거듭 주문했다.

 

그는 미국 정부의 우려를 나타내면서 한국 정부가 취해야 할 조치를 권고하는 각서를 본인이 이승만 대통령에게 전달하고, 허터 국무부 장관은 양유찬 주미한국대사에게 전달하도록 하자고 주장했다.

 

4월 18일엔 시위의 주도 세력이 고교생들에서 대학생들로 바뀌고, 19일엔 데모가 대규모로 확산되었다.

 

주한미국대사관은 시시각각 국무부에 전문을 보내면서 그런 보고를 미국 군부에도 전해달라고 요구했다. 주한유엔군사령부는 김정렬 국방부 장관과 송요찬 육군참모총장이 경무대에서 요청한 한국군 제15사단의 병력 이동을 승인했다.

 

4월 19일 계엄령이 선포되는 등 정세가 급변하자 매카노기는 시위자들과 당국이 폭력을 자제하고 법과 질서를 되찾아 "정당한 불만"이 해결되기를 바란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는 경무대에 긴급하게 요청해 김정렬 국방부 장관과 홍진기 내무부 장관이 배석한 가운데 이승만 대통령을 만났다. 

 

이승만은 매카노기에게 장면 부통령과 민주당 지도자들이 봉기를 선동하고 있다며 그들을 격렬하게 비난했다. 매카노기는 봉기의 근본 원인이 3월 15일의 광범위한 선거 부정과 경찰의 강압에 있다면서, 유혈 사태를 방지하고 민주당 지도자와 학생 시위자들에게 가혹한 처벌을 하지 말도록 권고했다. 

 

아울러 유엔군사령부의 책임이 한반도에서 "안전하고 안정된 작전기지를 유지하는 중대한 이익을 미국에 제공하는 것"인데 이것이 위험에 빠져 있다고 강조했다. 이승만이 최근 사태에 유감을 표명하고 정부가 국민의 불만 해소책을 강구하리라는 확신을 줄 수 있는 방송 메시지를 직접 녹음해 발표할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

 

4월 19일 워싱턴에서는 허터 국무부 장관이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한국의 정세변화를 보고하며 1-2일 후 이승만 대통령과 통화할 것을 건의했다. 미국이 "기술적으로는" 한국의 내정에 간섭하고 있지만 "특별한 정당성"이 있다면서, 최소한 부통령에 대한 재선거만 한국의 상황을 수습할 수 있다는 매카노기의 견해를 보고했다. 

 

아이젠하워는 미국이 이승만에게 강경하게 대응하도록 하고 매카노기가 그의 의견을 이승만에게 전달하도록 지시했다. 허터는 양유찬 주미한국대사를 불러 각서를 읽으며 한국의 불안한 정세 때문에 미국 국민과 의회가 아이젠하워의 6월 방한에 회의적이라고 경고했다.

 

4월 21일 매카노기가 국무부 훈령을 받아들고 다시 경무대를 방문했다. 이미 전날 워싱턴의 양유찬으로부터 허터와의 면담을 보고받은 이승만은 우선 4.19 봉기에 대한 미국의 반응에 놀라움과 우려를 표명했다. 

 

이승만은 한국의 사태는 국민의 불만이 반영된 게 아니라 일부 천주교 세력의 지지를 받고 있는 "장면의 음모"라고 거듭 강조하며, 미국이 이러한 진상을 파악하지 못한 채 대한정책을 추구한다면 엄청난 혼란을 초래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미국 언론이 한국의 봉기를 집중 보도함으로써 사태를 악화시키고 있다는 불만도 토로했다. 

 

이에 매카노기는 미국의 모든 정보망을 통해 볼 때 장면이 봉기의 선동자가 절대 아니라 오히려 "충성스러운 야당의 충실한 지도자"이며, 봉기는 민중의 정당한 불만에 근거하여 자발적으로 일어났다고 반박했다.

 

4월 25일엔 계엄령에도 불구하고 대학교수단의 시국 선언과 시위행진이 대규모의 군중 데모로 발전하고, 4월 26일 아침에는 최소한 5만 명의 시위대가 서울 중심부를 행진하는 "극도로 심각한 상황"이 발생했다. 

 

오전 9시 10분, 매카노기가 김정렬 국방부 장관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 당장 경무대로 가서 대통령이 즉시 학생대표단을 만나고 선거 재실시에 관한 성명을 발표하도록 촉구하라는 것이었다. 주한미국대사가 최대한 빨리 대통령을 만나고 싶다는 뜻도 강력하게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9시 20분엔 매그루더 주한미군사령관에게 전화해 곧 경무대를 방문할 예정이니 함께 대통령을 만나러 가자고 했다.

 

9시 40분이 되도록 경무대에서 연락이 없었다. 그 사이 시위군중이 늘어나고 발포 결정이 내려졌다. 이젠 실바 중앙정보국 한국지부장이 경무대의 박찬일 대통령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매카노기와 매그루더가 함께 경무대로 갈 텐데 지금 즉시 대통령과의 면담이 이루어지기 바란다고 독촉했다. 

 

9시 45분 매카노기가 성명을 발표했다. 한국민은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당국을 지지할 책임이 있고, 당국은 국민의 정당한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즉각적이고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 할 책임이 있으며 지금은 미봉책을 쓸 때가 아니라는 내용이었다.

 

10시 15분 김정렬이 매카노기에게 전화했다. 이승만이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사임할 것과 선거 재실시를 명령했다는 내용의 성명을 준비해놓고 발표 여부를 고려하고 있으며 매카노기를 만나고 싶어 한다고 했다. 10시 27분 매카노기와 매그루더가 경무대로 출발하고, 10시 30분 이승만의 '하야 고려' 성명이 발표되었다. 

 

10시 35분 주한미국대사와 주한미군사령관이 경무대에 도착했다. 매카노기의 요청대로 이승만이 학생대표단과 면담을 마친 직후였다. 김정렬이 건네 준 영어로 번역된 성명의 내용은 다음의 네 가지였다. 

 

 (1) 만약 전 국민이 바란다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 (If it is the wishes of the whole people, I am glad to resign from the presidential office.) (2) 3.15 선거가 불법으로 치러졌다고 들었기 때문에 대통령선거를 재실시하라고 이미 명령했다 (3) 선거에 개입된 모든 불법성을 제거하기 위해 이기붕에게 모든 정치적 지위에서 물러나도록 명령했다 (4) 만약 국민이 원한다면 내각책임제로 헌법을 개정하겠다.

 

이에 매카노기는 각 항목에 대해 분명한 뜻을 요구했다. 특히, 첫째 항목과 관련해, 이승만이 "내가 만약 (국민) 여러분에게 방해가 된다면 물러나겠다 (if I stand in your way, I will resign)"는 의미라고 설명하자, 매카노기는 이 경우에 국민의 뜻을 어떻게 결정할 것이냐며 그의 성명이 유보적이고 단서 조항이 전적으로 분명하지 못하다고 날카롭게 지적했다.

그는 이승만에게 현재 "매우 위험하고 폭발적인" 정세가 "명확하고 만족스런" 결의의 표명을 절대적으로 요구하고 있다고 강조하며 위의 네 가지 조항이 국민의 요구에 충분하다고 생각하는지 물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할 것 (we doing all we can)"이라는 이승만의 대답에 매카노기는 "명확하고 이해할 수 있는" 의지의 표명이 꼭 필요하다고 반복해서 단호하게 지적하며 현 상황에서 "애매한 표현과 임시변통"은 위험하다고 했다.

 

이승만이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할 것(government doing all it could)"이라며 계속 명확한 대답을 피하자, 매카노기는 한국민의 "정당한 요구"뿐만 아니라 "근본적인 미국의 이익"까지 위험에 처해 있다는 미국의 우려를 드러냈다. 

 

나아가 이승만을 "평생 동안 어떤 한국인보다 더 공경받고 존경받아온 한국 민족의 진정한 아버지"라고 추켜세우며 회유하기 시작했다. 이승만을 조지 워싱턴과 비교하기도 하며 다음과 같이 물러나라고 권유했다.

 

 "너무 오랫동안 너무 많은 일을 해온 연로한 정치가는 그의 책무로부터 벗어나서 존경받는 자리로 은퇴하고, 특히 지금같이 복잡하고 어려운 시기에는 정부의 부담을 젊은 사람들에게 넘겨주어야 한다고 국민이 믿는 때 (when people believe that elder statesman, having carried so many burdens for so many years, should step away from his responsibilities, retire to position respect, and turn burdens government, especially in these complicated and difficult times, over to younger men)"가 한국에 도래했다.

 

이승만이 미국의 우려 표명에 대해 깊이 인식한다며, 그러한 우려가 한국을 돕기 위한 미국의 욕망을 나타내는 것으로 간주한다고 대꾸했다. 이에 매카노기는 김정렬을 다그쳤다.

 

대통령이 서울 시민들과 현재 시위 중인 사람들의 심정을 진정으로 이해한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이승만이 직접 대답했다. 자신이 젊었을 때는 분명히 국민을 잘 알았으며 지금도 물론 그렇다고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4월 27일 이승만은 사직서를 국회에 제출하고 마침내 사임 성명을 발표했다. 그는 1945~1948년의 미군정 기간에 "미국의 사람"으로 선택되어 "미군과 달러와 경찰"로 남한을 지배해오다, 독재정치와 휴전 반대 때문에 1952~1953년 사이 적어도 두 번에 걸쳐 미국에 의해 극비리에 제거될 위기를 넘겼지만, 1960년 4월 결국 미국의 버림을 받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