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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근히 5.16 쿠데타를 원했던 미국


은근히 5.16 쿠데타를 원했던 미국

[한반도문제와 미국의 개입] 5.16쿠데타와 미국의 역할 (2)


3. 사월혁명 이후 5.16쿠데타까지 한국의 상황과 미국의 대응

(1) 민족통일운동과 반미감정

 

1960년 7.29 총선에 따라 들어선 장면 내각과 미국을 가장 곤란하게 만든 것은 4월혁명의 영향으로 불붙은 민족통일운동과 반미감정의 확산이었다. 1960년 6월 재미동포 김용중과 일본에서 귀국한 김삼규가 통일 논의에 불을 붙였다. 

 

이 가운데 김삼규는 1948년부터 <동아일보> 편집국장과 주필을 지내며 이승만 정부를 비판하다 1952년 일본으로 쫓겨가 평화통일문제를 연구해온 터였다.

 

7.29 총선을 계기로 진보 정당과 사회단체들에 의해 활발하게 전개된 통일 논의는 곧 언론과 문단 및 학원으로 폭넓게 확산되었다. 대부분의 통일론은 자주와 평화를 바탕으로 남북교류나 중립화를 표방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초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민족 자주는 외세의 배격을 의미했고 이의 핵심은 주한미군 철수였기 때문이다.

 

1960년 9월 3일 혁신세력을 중심으로 한 <민족자주통일 중앙협의회>가 만들어졌다. 11월부터는 대학생들도 통일 논의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기 시작했다. 이에 장면은 11월 4일 정부 정책과 다른 통일운동에 대해 선도책을 펴되 과격한 행동은 법에 따라 처단하겠다고 발표했다. 미국 국무부는 다음날 유엔 감시하의 남북한 총선거를 통해 통일을 달성한다는 결의를 재확인했다. 그러나 혁신세력과 학생들의 통일 논의는 중단되지 않았다.

 

11월 16일에는 연세대학교 학생들이 학내 분규와 관련해 미국인 이사장과 총장 서리가 미국으로 돌아갈 것을 외치며 미국대사관 앞에서 반미데모를 벌이기도 했다. "나라와 학원의 민주화는 달러가 보증해 주지 않는다"며 "달러가 가져오는 노예근성"부터 막아야 한다는 결의문까지 나왔다.

 

이러한 상황에서 통일운동은 날로 확산되었다. 1961년 초까지 전국 거의 모든 대학교과 20여 개 고등학교에 '민족통일연맹'이 결성되었다. 사대당을 비롯한 혁신세력은 여전히 한반도 중립화통일을 주장하거나 남북교류를 촉구했다. 

 

1961년 2월 8일 체결된 '한미경제협정'은 한국전쟁 이후 남한 최초의 조직적이고 광범위한 반미운동을 불러왔다. "양키 고우 홈!"이란 구호도 등장했다. 진보적 정당과 사회단체 그리고 대학생들은 이 협정이 한국의 경제적 예속을 제도화하며 미국이 한국 내정에 공식적으로 간섭할 수 있도록 이끄는 불평등 조약이라며, '한미경제협정 반대투쟁위원회'를 결성해 이 협정의 즉각 철회와 비준 거부를 요구했다. 이와 아울러 주한미군부대 종업원들은 2월 중순부터 한미행정협정 (SOFA) 체결을 촉구하는 데모를 벌이기 시작했다.

 

 (2) 장면 정부에 대한 미국의 불만

 

 자주를 내세운 통일운동은 북한을 인정하지 않는 미국의 이익에 전적으로 배치되었고, 반미감정의 확산은 미국에 긴장과 불안을 안겨주었다. 미국 정부는 미국의 충고를 잘 받아들이며 미국의 정책에 우호적인 장면을 호의적으로 평가하면서도, 자주적 통일운동과 반미감정의 확산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하는 그에게 회의적 입장을 취하기 시작했다.

 

미국은 한국의 정세 불안이 지속되면 혁명 세력이 진출하고 사회주의 세력이 강화할 수 있으리라 우려하면서, 지도력과 결단력이 부족한 장면이 한국의 정치안정과 미국의 안보이익을 지켜줄 수 있는 적합한 인물이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장면의 지도력에 관한 문제는 끊임없이 제기됐다. 매카노기는 장면이 우유부단하며 무능하다고 평가하며, 장면 정부가 여러 가지 면에서 취약하고 민주당이 과거의 자유당처럼 부패해지고 있다고 파악했다. 

 

매카노기는 주한미국대사 임기를 마치면서 1961년 4월 11일 한미경제협정 및 한미행정협정 문제에 따른 한국인들의 반미감정을 국무부에 보고했다. 미국이 장면의 지도력과 관련해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장면이 성격상 강력한 지도자가 아닌데 그의 스타일을 바꾸기는 어렵겠지만, 미국은 그가 단호하게 행동하도록 지속적으로 촉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매카노기는 "특히 이러한 도발적인 시기" 또는 "준 비상시"에 장면이 정치력을 발휘할 수 없다고 평가하며, 그에 대한 미국 관리들의 자문이 더욱 강력하게 행해져야 할 것이라고 했다.

 

한국에 대한 원조를 담당한 미국 국제협력국 (ICA) 기술원조 프로그램 책임자 휴 파알리 (Hugh Farley)는 백악관에 제출한 "1961년 2월의 한국 상황"이란 보고서에서 당시의 한국을 "병든 사회"로 단정했다. 한국사회 전반에 "뇌물과 부패와 사기"가 만연한 가운데 정부의 부패 때문에 4월혁명이 완결되지 않고 있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한국 군부가 "미국의 치밀한 지도 아래" 정화운동을 전개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히며, 최근의 반미데모와 관련해 미국이 한국의 내정에 적극 간섭할 것을 건의했다.

 

(3) 쿠데타 음모와 미국의 대응
 
4월혁명 직후인 1960년 6월부터 한국에서 다양한 쿠데타 소문들이 나돌았다. 미국은 대응책을 마련하고 있었다. 장면 집권 3개월 만에 군부에 의한 정권교체를 막연하게나마 원했던 것이다. 

 

1960년 11월 22일 중앙정보국, 국무부, 육군, 해군, 공군, 그리고 3군통합 합동참모본부의 정보기관들이 공동으로 작성한 한국에 대한 전망 보고서는 당시엔 군사쿠데타가 성공할 것 같지 않다고 믿었다. 한국군부가 민간정권을 대체하려면 한국 상황이 더 악화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파알리도 앞에서 소개한 "1961년 2월의 한국 상황"이란 보고서에서 미국의 입장은 군사쿠데타나 "위험하고 가능성이 희박한" 극좌 혹은 극우 세력의 결합 말고는 장면 정부에 대한 대안이 없다는 것 같다고 했다. 미국의 정보 책임자들과 대한 원조 책임자 모두 장면 정권의 교체를 바랐던 것이다.

 

한편, 중앙정보국은 늦어도 1961년 4월 박정희가 주도하는 쿠데타 음모에 대한 정보를 구체적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4월 21일부터 중앙정보국 한국지부가 박정희의 쿠데타 계획을 본부에 보고했다. 그러나 덜레스 국장은 5월 16일 쿠데타가 일어난 직후에야 케네디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앞에서 얘기한 대로 국무부가 1996년 펴낸 의 한국 부분에 1961년 4월 12일부터 5월 15일까지 한 달이 넘는 기간의 기록이 통째로 빠져 있는 것과 겹치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