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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호 소식지] 회원과의 인터뷰 -정희진 회원

따뜻한 햇살이 창가로 스며드는 주말 사무실, 보고 싶은 회원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거창에 살고 있는 정희진 회원입니다. 편집위원들과 함께 직접 거창으로 찾아가 인터뷰 하려고 했지만 마침 익산에 모임이 있다고 하여 때마침 자리를 마련하였습니다. 정희진 회원은 20036월부터 200812월까지 익산참여연대에서 상근활동가로 일했습니다. 좀 더 궁금한 이야기들은 질문과 함께 만나 보도록 하겠습니다.

 

                                                                                             정희진 회원

 

 

참여연대와 첫 인연은 어떻게 시작된 건가요?

대학 졸업 후 예전 민주노총 사무실의 귀퉁이 건설노조 사무실에서 일을 했습니다

. ‘새시대노동자회라는 사회단체에서 활동을 하고 있었어요, ‘갈숲마을, 새시대노동자회. 청년회’ 3개 단체가 통합개념이라고 하긴 그렇지만 익산참여연대가 새롭게 탄생할 때 세 개 단체 구성원들이 주축이 되어져서 만들어졌고 그 인연으로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습니다. 제가 건설노조 다닐 때 참여연대 상근자 모집 공고를 보고 지원해서 바로 채용되어 6년여 정도 근무를 했습니다.

 

가족과 하시는 일 소개 부탁드립니다.

가족은 남편과 아들 둘이 있는데요.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큰애는 시원, 작은애는 채원, 그리고 같이 회원활동 하는 남편 이응혁 씨입니다. 애들은 커서 둘 다 대학생이 되었어요. 신랑은 사과 농사를 짓고 있고, 저는 사과포도를 주로 생산하는 사과포도 영농조합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근무한 지도 어느 덧 8년이 넘었습니다. 남편은 25살 때 새시대노동자회에서 처음 만났어요. 처음엔 서로에게 아무 감정도 없었는데 4년 후인 29살에 본격적으로 남편 대학 동기들과 모임이 잦아지면서 같이 맛있는 것 먹으면서 놀러 다니다 다음 해인 서른 살에 결혼 했습니다.

친구처럼 지내며 행복하게 잘 살고 있습니다. “결혼은 여자하기 나름이잖아요. ㅎㅎㅎ

 

본인의 성격은 어떤 거 같아요, 별명 같은 것 있으세요?

이 질문은 제 주위 분들에게 물어봐야 잘 알 것 같은데요?^^ 제 입으로 말하기가 쑥스럽네요. 까칠할 때는 까칠하고 너그러울 때는 너그러워요. 저는 적당히 게으릅니다. 제가 참여연대 근무를 시작하면서 별명(별칭)을 써야 했는데 그때 만들었던 게 지킴이였어요. 뭔가 정의나 선을 지켜주고 싶다, 오래도록 지켜나가고 싶다는 의미에서죠~(인터뷰 하는 동안 옆에 계신 이응혁 회원님은 성격 좋아요.~~” 라고 말씀하시네요. ^^)

 

회원님은 어떤 꿈을 꾸고 있나요?

우리 아들들도 그렇고 의외로 하고 싶은 게 있는지, 꿈이 뭔지 물어보면 제대로 모르겠다고 해요. 저도 어렸을 땐 그랬고 막연하게 다른 사

람들의 꿈이 내 꿈 인양 그렇게 살아왔어요. 그런데 대학에 입학하고 나면서부터 정의로운 사람이 되자라고 마음먹었던 것 같아요. 세월이 지나고 나이가 들면서 청년기 때만큼 정의감이 넘치지는 않지만, 지금도 여전히 정의롭게 살아야 하지 않나 다짐을 합니다. 앞으로도 그 마음은 영원히 변할 것 같진 않아요.

 

 

거창으로 이사 간 이유가 있나요?

시아버지께서 기자를 하시다가 80년대 해직되시고 고향인 거창으로 내려가셨습니다. 그곳에서 사과 농사를 지으시면서 살고 계셨습니다. 저희는 익산에서 결혼을 하고 친정 가까운 곳에서 정착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결혼하고 3년 정도 이후부터 남편은 타지에서 일을 했기 때문에 거의 8년여의 시간을 주말부부로 지냈습니다. 참여연대에서 일을 하면서 어린 아이 둘을 돌봐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고 친정엄마의 도움을 받았지만 지치고 정말 힘들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봐도 하루하루 쉽지 않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둘째 아이가 아토피가 심하기도 했고, 아버님이 혼자 계셔서 큰 결정을 내리게 되었던 거죠.

 

거창으로 내려가신 뒤 어려움은 없으셨나요?

익산과 거창은 큰 차이점이 있는데요. 전라도와 경상도라고 하는 거예요. 익산은 제가 나고 자라고 학교도 다녀서 음식부터 정치 문화 이런 게 공통적으로 맞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것들이 주는 안정감과 편안함이 있었지만 경상도는 말 자체부터 틀려요. 대화할 때 말의 억양과 뜻을 한참 생각해야 이해할 수 있었어요. 경상도 사람들의 습관이나 사고방식, 정치적 입장, 문화 등등 많은 부분이 같은 대한민국인데도 차이가 있었어요. 낯설음과 어색함 같은 것들 때문에 힘들었어요. 익산에 올 때면 단체 행사에 매번 같이 하진 않아도 푸근하고 집에 온 듯 느낌이 좋은 것 같아요.

 

이젠 거창에서 10년 넘게 생활하다보니 소통할 수 있는 사람들이 하나둘 생기고 같이 할 수 있는 모임들이 만들어지고 인연이 이어지다 보니 많이 편안하고 좋아졌어요.

저희가 내려간 지 얼마 안 돼 시아버님께서 돌아가셨고, 사과 농사도 3년 정도까지는 잘되지 않았습니다. 교육도 다니고 주변 이웃들의 도움을 받아 배워가면서 열심히 일을 하다 보니 지금은 어느 정도 궤도에 올랐고 나아졌습니다. 남편의 성실함과 꾸준함이 만들어낸 결과입니다.

 

예전에 참여연대에서 상근자로 일하실 때와 10년 넘은 지금 회원으로 느끼는 참여연대는 어떤 거 같아요?

큰 차이점은 회원 수가 늘어난 부분이겠죠. 익산에 살았을 때 느끼는 것과 거리상 멀리 있다 보니 느껴지는 거리감이 만만치 않아요. 어떤 행사든지 마음만 먹으면 참여가 가능했지만 지금은 그런 경우가 많질 않아서 상대적으로 그런 차이점이 큰 것 같아요. 회원으로서 열심히 해야 하는데 이런 마음이 조금씩 멀어지는 것 같아 어떻게 극복해야 하나 고민만 하는 난처한 문제들이 있습니다.

 

가장 존경하는 분은 어떤 분이신가요?

주위에 많은 분들이 있고 제가 그분들의 영향을 받아 살고 있는 건 자명한 사실인데요. 그래도 가장 존경하는 분은 저희 부모님입니다. 누구나 다 그렇겠지만요.^^

 

지금은 익산을 떠나 계시지만 익산이 앞으로 어떠한 방향으로 발전해 가면 좋을지 말씀해 주시겠어요?

글쎄요. 모든 지방 도시들이 갖고 있는 문제점이 한 두 가지겠습니까? 어찌됐든 시민들이 잘 살고 모두가 다 만족 할 순 없지만 시민들의 입장에서 최대한 우리 도시 참 좋은 곳이야. 살기 좋은 곳이야 라고 느껴질 수 있게 발전해나갔으면 합니다. 사람살기 편한 도시. 애 낳고 살기 좋은 도시, 노인들이 편안하게 살 수 있는 도시이기를 바랍니다.

 

내가 만약 대통령이라면... 가장 먼저 하고 싶은 게 뭘까요?

한 번도 생각해 본적이 없는데. 하하하~~ 남편과 둘이 오면서 차 안에서 방송을 들었는데요. 반민특위 이야기가 나왔어요. “우리나라가 이렇게 정의롭지 못하고 뭔가 선이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게 된 시점이 바로 반민특위가 해체되면서부터 아닌가?”라고 어떤 분이 말씀을 하셨어요. 그 이야기를 듣고 보니 저 또한 만약 그런 권한이 주어져 할 수만 있다면 반민특위를 다시 구성해서 청산하지 못하고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고 명확히 처리하고 싶네요.

 

20주년을 맞은 참여연대에 바라고 싶은 말씀 한마디 해주세요.

먼저 20주년 익산참여연대 대견합니다. 한 단체가 꾸준히 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 20년을 버텨내기가 쉽지 않은데 우리 익산참여연대는 해냈고 앞으로도 잘해낼 거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역사는 지역과 회원들의 도움이 컸지만 무엇보다 상근 활동가들의 노력과 헌신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회원으로서 그저 고마울 뿐이

.

 

 

인터뷰 질문이 상근간사 모집 때 면접만큼이나 어려웠다는 정희진 회원님 ^^ 작은 몸으로 어려울 때 참여연대를 이끄는 상근활동가로, 지금은 가족 같은 회원으로 함께 해주시고 계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장무상망(長毋忘相)’ 이란 말 알고계시죠? 오래도록 서로를 잊지 말자 라는 말이잖아요. 정희진 회원님 먼 길 고생 많으셨습니다. 오래도록 함께할게요. ^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