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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와 활동/사업소식

익산참여연대 역사문화기행 ‘백두에서 내달린 국토의 종착점 해남기행

2007-10-30 오전 9:31:29, 조회수 : 563


익산참여연대 역사문화기행 ‘백두에서 내달린 국토의 종착점 해남기행

일    시 : 2006년 4월 30일(일) 오전 8시

출발장소 : 국민생활관 앞 오전 8시

강    사 : 원광대학교 박물관 이종엽학예사
회    비 : 일반 15,000원, 어린이 10,000원
준 비 물 : 도시락, 야외용 돗자리



해남에서 남쪽으로 난 지방도는 너른 들판 가운데로 한 줄기 가르마처럼 뻗어 대둔사까지 이어진다. 그 길을 따라 해남읍에서 2km 가량을 내려오면 왼쪽 길가에 '고산 윤선도 고택'이라는 안내간판이 섰고 거기서 마을길을 따라 들판 안쪽으로 꽤 깊숙이 들어간 곳에 연동마을이 있다.
녹우당은 이 마을에 있는 해남윤씨 종가를 일컫는다.
해남윤씨는 연안이씨, 여흥민씨와 함께 해남땅의 큰 성씨로서 명문으로 꼽힌다.
조선 중기의 학자이자 시조 작가인 고산 윤선도와 그의 증손이며 선비화가로 유명한 공재 윤두서가 이 집안에서 난 사람이니, 녹우당은 그들의 자취가 밴 옛집이다.
집을 향해 들어가다 보면 마을 어귀쯤 되는 곳 오른쪽에 나지막한 둔덕이 꾸며져 있고 네모난 연못이 파여 있다. 못 주변에는 해송이 작은 숲을 이루고 있으며 못 안에 마련된 두 개의 네모난 섬에도 해송이 심어져 있다.

요즘은 연못을 별로 가꾸지 않는 듯하고 사람들도 관심없이 지나치곤 하는데, 이 못 있는 곳이 녹우당의 앞뜰이 되는 셈이다. 대문 바로 앞에는 높이 30여 m에 이르는 은행나무가 서 있다. 500년 가량 묵었다고 한다.
집 앞쪽 너른 터 양쪽에는 이 집안에 전해오는 유물을 전시한 전시관과 유물관리소가 있다. 녹우당은 전라남도에 남아 있는 민가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오래 되었다.
⼄자형을 이루며 안뜰을 둘러싼 안채와 사랑채를 중심으로 행랑채가 여러 동 있고 집 뒤편 담장 너머에 삼신제단이 있으며 그 동쪽에 해남윤씨의 중시조인 어초은 윤효정과 윤선도의 사당이 있다.

집 전체의 규모 60여 칸 가운데 집주인보다는 일하는 사람들에게 소용되는 공간이 더 넓어서 대지주 계층의 살림살이를 보여 준다. 집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있는 작은 못가와 안뜰의 입구 쪽에 여러 가지 꽃나무가 가꾸어져 있고 사당이 있는 후원 쪽에는 갖가지 과일나무들과 함께 채소밭이 꾸며져 있다.
짙은 대밭이 폭 감싸듯이 집 뒤를 둘렀다. 윤선도는 42세 되던 인조 6년(1628)에 봉림 대군과 인평 대군의 사부가 되었는데 봉림 대군은 나중의 효종이다. 효종은 즉위한 후 어린 시절의 사부였던 윤선도를 위해 수원에 집을 지어 주었다.
1660년에 효종이 죽자 윤선도는 고향으로 내려오면서 수원 집의 일부를 뜯어 옮겨왔다. 그것이 지금 녹우당의 사랑채이다. 지금은 해남윤시 종가 전체를 통틀어 녹우당으로 부르고들 있으나 원래는 그 사랑채 이름이 녹우당(綠雨堂)이다.
집 뒤 산자락에 우거진 비자숲이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쏴 하며 푸른 비가 내리는 듯하다고 하여 그런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녹우당 현판은 옥동 이서의 글씨이다. 이서는 성호 이익의 이복 형이며 그의 글씨는 동국진체 글씨의 원조로 일컬어진다.
그로부터 백하 윤순을 거쳐 원교 이광사에 이르러 동국진체는 완성된다. 이서는 윤두서와 절친한 사이었다.


연동마을 뒤 덕음산 자락의 비자숲은 500년 가량된 것으로 추정된다. 뒷산의 바위가 드러나면 마을이 가난해진다고 한 윤씨 시조의 유언에 따라 마을 사람들이 이 숲을 잘 간수해 왔다고 전해지며, 천연기념물 제241호로 지정되어 있다.  
지금 녹우당에는 윤선도의 14대손인 윤형식 씨가 살고 있다. 형식과 규모 면에서 호남의 대표적인 양반집으로 인정되어 사적 제167호로 지정된 집이기는 하지만, 지금도 살림을 하고 있는데다 늘 구경할 수 있도록 열어 놓은 집이 아니므로 '특별한 볼일이 없는 사람이' 집안을 기웃거리기 민망한 점이 있다.
그러나 집 앞 유물전시관에는 이 집의 볼 만한 보물들이 전시도어 있어서, 사람들은 이것을 보러 오기도 한다. 전시품들은 대부분 윤선도나 윤두서와 관련된 것들이다.
우선 「금쇄동집고(金鎖洞集古)」「산중신곡(山中新曲)」 등 윤선도가 직접 쓴 가첩(歌帖)들이 있고 사은첩(思恩帖, 인조와 봉림 대군이 윤선도의 집에 쌀과 포 등을 내리면서 보낸 사송장(賜送狀)을 모아 첩으로 만든 것) 등이 있는데 일괄하여 보물 제482호로 지정되어 있다. 또 보물 제483호인 「지정14년노비문권(至正十四年奴婢文卷)」이 있다.
이것은 고려 공민왕 대 윤광전이 큰아들 윤단학에게 노비를 상속해 준다는 문서인데 이두문으로 쓰여 있으며 승주 송광사 노비첩과 함께 희귀한 고려 시대의 문서이다.



『해남윤씨 가전 고화첩』은 윤두서의 작품들을 모은 것인데 그가 죽은 지 4년 뒤(1719)에 아들 윤덕희가 묶었다.
보물 제48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내용은 윤두서의 대표작이자 우리 나라 회화사상 가장 뛰어난 초상화로 꼽히는 그의 자화상(국보 제240호)을 비롯하여 『윤씨가보(尹氏家寶)』라는 표제의 화첩 두 권과『가전유묵(家傳遺墨)』이라고
표제를 단 서첩 세 권으로 되어 있다. 윤두서가 즐겨 그렸던 말 그림들, 조선 후기 풍속화의 선구로 평가되는 「나물 캐는 여인(採艾圖)」과 「목기깎기(旋車圖)」「산수인물도」 등이 이 화첩에 실려 있다.
그러나 지금 전시관에서는 윤두서의 그림을 사진복제품으로만 전시하고 있다. 언젠가
도난 소동이 있은 후에 그렇게 되었다는데 안타까운 일이다.



한편 윤두서가 직접 그린 별자리 그림, 동국여지지도(冬菊與地之圖)와 일본여도(日本與圖) 등 우리 나라와 일본 지도, 또 그가 보았던 기하책, 천문책 등은 그의 실학적 취향을 보여 주는 유물이다. 윤두서의 외증손인 정약용은 강진에 귀양와 있던 시절에 이 집에 소장되어 있던 많은 책들은 가져다 보았다고 한다.



우리 나라 육지의 절 가운데 가장 남쪽에 있는 미황사는 그 달마산 서쪽 중턱에 앉아 먼 데서 반짝이는 불빛처럼 조그맣게 빛나고 있다.
절로
들어가는 길이 숲 사이로 나 있을 뿐 절 아래에는 숙박업소나 구멍가게 같은 것도 하나 없이 한적하기만 하다.
한창 번성하던 때에는 스님들도 많이
있었고 주변에 열두 암자를 거느렸다는  절이지만 지금은 대웅보전(보물 제947호)과 응진전(보물 제1183호), 요사채 등 건물 몇 채만이 남아 경내가 조촐하고, 숲속에
떨어져 있는 넓은 부도밭과 사적비가 번성했던 옛날을 말해줄 뿐이다.



그러나 꼭 크고 기세등등해야만 좋은 것은 아니다. 예전에 비해 퇴락했다고는 하지만 달마사는 결코 적막하거나 스산한 절이 아니다.

바위산 능선이 그려 내는 거친 선을 병풍처럼 뒤에 두르고 동백나무 숲으로 소복히 감싸인 절터와 경쾌하되 가볍지 않은 대웅전의 참한 품새를 마주하고 보면, 오히려 '이렇게 포근하고 곱게 저물 수 있다면 저무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다'하는 기분까지 갖게 된다.

입암산 산줄기 능선 끝 바다를 향해 하늘이 열리는 곳.
이곳에 자연사 문화 박물관이 위치한다.
문화예술회관, 해양유물전시관, 향토문화관등 일대 문화시설들과 함께 하나의 근린공원 단지로 조성되고, 목포 자연사박물관은 지역의 자연과 생태를 전시하는 기능은 물론, 건물의 조형과 배치가 목포의 자연을 받아들이고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어야했다.

이미 조성되어 있는 서쪽 비파숲과 북쪽 소나무숲을 보존하고 바다를 향해 열리는 조망 축과 입암산의 산세, 대지 전면으로 확장될 도로에의해동.서 방향축을 결정하였다.
이두축에 따라 건물의 매스를 만들고 외부공간을 조직하였다.
남동쪽 바다를 향하는 조망 축에 따라 건물 진입 방향과 내외부 공간이 열린다. 외부 진입 마당과 녹지공간, 자연사관과 문화관의 동선흐름도 같이 하게된다.
배치는 북쪽 산에 최대한 기대어 입암산 정상에서 뻗어 내려오는 산세를 그대로 받아, 거스르지 않고, 도로축과 조망축을 따라 건물을 대지에 앉혔다. 대지 주변 산과 바다를 따라수평적으로 높지 않은 매스로 계획하였고, 내부 곳곳에서 대지주변 산과 바다를 내다볼수있게하였다. 입면재료는화강석, 천연사암등자연 재료와 바닷가 습기에서 부식을 피할수있는 금속재료를 적절히 사용하였다.


1층 중앙홀은 자연사박물관의 첫 이미지를 대변할수 있는상징홀의 성격으로, 한반도공룡의 골격 모형과화석, 발자국을전시한다. 공룡발자국은 바닥 부조로, 그래픽패널, 와이드컬러는벽을이용해전시하며, 대형파충류골격모형, 공룡화석을공간입체적으로전시하고있다.

특별전시실(조개전시실)은 표본위주의 나열식 구성보다는 좀더 설명적이고 체험을 유도할수 있도록 하며, 공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도록 무버블 파티션 및 독립진열장을 이용하고있다. 진열장, 사인, 부버블파티션, LCD프로젝터가 전시연출 매체로 사용되고 있다.

제1전시실(지질관)은 지구의 구조, 광물, 운석, 생명의 기원에 대한 화석을 전시하고있으며, 지역의 지질구조를 중심으로 설명하여 다른 자연사박물관과는 차별성을 두고있다.
전시관내 관람동선과 전시연출이 다양하고 지루하지 않도록, 그래픽패널과 화석부분을 좀더세분화 하여 시대순서에 따라 전시연출 하고 있다.
사용된 전시연출 매체는 와이드컬러, 벽면암석, 트라이비전, 그래픽패널,
지구모형, 암석, 광물, 진연장, 화석부조등을활용하고있다.
제2전시실(육상생명관)은 포유류의 분류와 인류의 기원에 대한 내용을 전시하고있다.
도입부에한국산 호랑이박제를연출, 육상생명관을상징한다. 대형디오라마를 이용하고있으며, 패널과 전시물을 복합적으로 연출하고 아이템을
세분화해서 연출하고 있다. 호랑이박제와 골격표본, 패널, 진열장, 디오라마등이 전시연출매체로 활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