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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연대 이야기 마당

[칼럼] 자기개발서와 힐링. 괜찮은가요?

자기개발서와 힐링. 괜찮은가요?

 

 

지금이야 많이들 읽고 한번쯤은 거쳐야 할 과정처럼 여기는 거지만 사실 읽고 또 읽어도 끝이 없는 것이 자기개발서다. 자기개발이란 자신의 재능과 소질을 높이는 것으로, 어떤 일에 있어 수행능력과 경쟁력을 높이는 것이다. 뭐, 나무랄 데 없이 좋은 의미다.
하지만 오늘날 치열한 경쟁과 승부가 생존의 법칙이 되어버린 정글의 사회에서는 자기개발은 곧 스펙으로 통한다. 해도 해도 끝나지 않는 자기개발과 스펙은 경쟁이 멈추지 않는 사회생활에서 하나의 생존법칙이 되어버렸다. 한 동안 기업은 물론이고 대학과 지역사회 등 전 사회적으로 붐을 일으키며 강연과 서적으로 종횡무진 했던 자기개발 열풍은 잠잠해지긴 했지만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상대와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힘과 수단을 갖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두드리고. 단련이란 이름으로 진행되는 자기개발은 곧 과도한 경쟁이 낳은 부작용이다. 자기학대와 다를 바 없다.

소질과 능력을 키워서 자신은 물론 주변을 이롭게 하기위해 시작된 자기개발이 상대를 이기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해 버린 것이니 여기에 무슨 기쁨과 보람이 남아 있겠는가. 남는 것은 오직 과도한 스펙과 스트레스뿐이다.
해도 해도 채워지지 않고 나아지지 않는 불안과 스트레스로 온 사회가 집단적 피로감에 찌들어 있을 때 신앙처럼 등장한 것이 힐링이고 인문학 강좌다.



힐링이 무엇인가. 치유다. 무엇에 대한 치유인가 하면 고통과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사람에 대한 치유다. 그렇다고 누가 치료해주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알아서 치유하란다. 어떻게? 모든 것은 생각하기 나름이고 맘먹기에 따라 다르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어떤 것도 결국 시간에 따라 지나가는 것이니 너무 깊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언뜻 보면 맞는 말이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고통과 스트레스가 나로부터 온 것이 아닌데 왜 내가 나를 치료한다는 것인가. 원인을 치료해야 진정한 치료가 아닌가. 원인은 계속되고 있는데 맘 한번 바꿔먹었다고 해서 달라지겠는가. 그 환경을 떠나지 않는 한은 계속되는 것이다. 그러니 사회로부터 온 고통과 스트레스는 그 사회 환경이 달라지지 않는 한 치료라 할 수 없다. 결국 자가 힐링은 대증요법이다. 정작 중요한 것은 치열한 경쟁과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사회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그런데 사회에 관심을 두어야 하고 문제해결에 나서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은 드물다. 그 많은 힐링의 대부분은 종교적인 성격으로 인해 많은 사람을 사회로부터 차단하고 일시적인 위안에 만족할 것을 권한다. 그래서 오늘도 고통은 계속되고 스트레스는 쌓여간다.



예전과 달리 곳곳에서 많은 강연과 독서회가 활동 중이다. 하지만 적잖은 부분이 이러한 자기개발과 힐링에 관한 내용이다. 심지어 시민단체에서 하는 강연조차 이러한 강연이 심심치 않다. 이래서야 달라지겠는가.

한 사람의 생존과 생활은 사람관계와 사회로부터 떨어질 수 없다는 것은 기본이다. 때문에 자신을 둘러싼 사회에 대해 잘 알 수 있도록 돕고, 사회적 문제해결에 힘을 보탤 수 있도록 안내하는 것이 진정한 힐링이지 않을까. 자가 치유가 아닌 사회적 치유 말이다.



지난 소고기촛불집회부터 최근에 세월호촛불에 이르기까지 우리사회는 얼마나 변했을까. 자기개발과 힐링이 주는 영향은 긍정적이었을까. 최소한 그 사이 진행된 그 많은 독서열풍과 그 많은 강연과 교육은 어디에 축적되었을까.

많은 이들이 우리사회가 보수화되는 수준을 넘어 극단으로 치닫고 있다고 우려한다. 절대 권력과 종북 몰이로 침묵과 복종만을 강요하는 사회가 되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최근엔 사제폭탄테러까지 등장하고.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져야 할 서북청년단까지 등장한 세상이다. 헌법재판소의 정당해산판결을 보면서 정치적 결사와 표현의 자유마저 위협받고 있는 사태를 목도하게 된다. 정당과 정치는 실종되고, 종편과 정부가 주는 정보로 살아가는 세상이 곧 조지오웰의 빅브라더가 아닌가.



오늘 우리사회를 지배하는 두 가지의 그늘이 있다면 그것은 일제가 만들어놓은 친일과 식민역사가 하나요, 전쟁으로 빚어진 이념대립의 사생아 종북 이데올로기가 다른 하나다. 현대사에 큰 상처로 기록된 친일과 분단은 지금도 우리 사회를 읽는 핵심단어가 아닐 수 없다.

때문에 우리 사회를 알고 사회의 병적 문제에 접근하려면 역사부터 제대로 알아야 하는 것이다. 역사에 대한 독서와 강연이 자기개발과 힐링만큼이나 널리 퍼지기를 기대해본다.



일제 식민통치의 마지막 총독인 아베 노부유키가 패전으로 물러나면서 큰소리쳤다고 한다.

“우리는 패했지만 조선은 승리한 것이 아니다, 장담하건대 조선민이 제 정신을 차리고 찬란하고 위대했던 옛 조선의 영광을 되찾으려면 100년이라는 세월이 훨씬 더 걸릴 것이다. 우리 일본은 조선인에게 총과 대포보다 무서운 식민교육을 심어 놓았다. 결국은 서로 이간질하며 노예적인 삶을 살 것이다. 보라, 실로 조선은 위대했고 찬란했지만 현재 조선은 결국 식민교육의 노예로 전락할 것이다. 그리고 나 아베 노부유키는 다시 돌아온다.”

 


글 이영훈 (익산참여연대 전 대표)

 

- 이 글은 익산참여연대 소식지 참여와자치 69호 칼럼글에 실린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