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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에블로호와 치욕적 북미협상] <4> 새로운 북미관계를 위하여 북한, 이제 미국에 푸에블로호 넘겨 줘라 [푸에블로호와 치욕적 북미협상] 새로운 북미관계를 위하여 북한, 이제 미국에 푸에블로호 넘겨 줘라 1) 북한에 사과하지 않으려 했던 미국, 결국엔 6. 푸에블로호 사건 이후에도 이어진 미국의 굴욕 앞에서 얘기했듯, 시체 1구를 포함한 푸에블로호 승무원 83명은 북한에 나포된 지 꼭 11개월 만인 1968년 12월 23일 풀려났다. 그들이 미국으로 돌아가자 해군은 청문회를 열어 2~3개월 동안 조사하고 함장과 정보수집 책임장교 그리고 항해사 등을 군법회의에 넘길 것을 요구했다. 다음과 같은 죄목이었다. "푸에블로호를 보호하고 방어하는데 실패했다. 북한군의 명령에 따라 원산항으로 운항했다. 승무원들에게 비밀서류를 파기하는 방법을 적절하게 훈련시키지 못했다. 북한군에 .. 더보기
[푸에블로호와 치욕적 북미협상] <3> 북한의 호통과 미국의 꼼수 북한에 사과하지 않으려 했던 미국, 결국엔 [푸에블로호와 치욕적 북미협상] 북한의 호통과 미국의 꼼수 이재봉 원광대학교 교수 3. 미국의 전방위 외교 1968년 1월 23일 푸에블로호가 나포되자 미국 국무부는 그날 모스크바 주재 미국대사관에 전보를 보냈다. 그로미코 (Andrei Gromyko) 소련 외상을 만나 미국 배와 승무원들이 빨리 풀려날 수 있도록 북한에 강력하게 항의하며 영향력을 행사해달라고 부탁하라는 내용이었다. 당시 모스크바를 방문 중이던 윌슨 (Harold Wilson) 영국 수상에게도 연락했다. 코시긴 (Alexi Kosygin) 소련 수상에게 선처를 부탁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로미코는 소련이 관여할 문제가 아니라고 대꾸했다. 남한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들 때문에 한반도에서 긴장이 생기고 .. 더보기
[푸에블로호와 치욕적 북미협상] <2> 븍한, 푸에블로호 나포한 이유 40년 전, 핵 없던 북한이 미국에게 했던 일은 [푸에블로호와 치욕적 북미협상] 븍한, 푸에블로호 나포한 이유 이재봉 원광대학교 교수 40년 전, 핵 없던 북한이 미국에게 했던 일은 2. 북한의 푸에블로호 나포는 베트남을 돕기 위한 전략 1968년 1월 푸에블로호가 북한에 나포될 무렵 미국에겐 온갖 악재가 겹쳐 터지고 위기가 잇따르고 있었다. 이틀 전인 1월 21일엔 앞에 소개한 북한 무장침투조의 '청와대 습격' 뿐만 아니라, 북베트남 군대의 '케산 (Khe Sanh) 공습'이 시작됐다. 덴마크령 그린란드 (Greenland)의 미국 공군기지에서는 4개의 수소폭탄을 실은 B-52 폭격기가 추락하는 사고도 터졌다. 이와 관련해 미국은 1965년 3월 북베트남을 폭격하면서 본격적인 침공을 벌이기 시작했는데 .. 더보기
[연재]대동강의 푸에블로, 북미관계 70년의 키워드 대동강의 푸에블로, 북미관계 70년의 키워드 [푸에블로호와 치욕적 북미협상] 연재를 시작하며 이재봉 원광대학교 교수 6월 12일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푸에블로호와 북미협상에 관해 연재를 시작한다. 지난 4월 '한반도 문제와 미국의 개입'을 주제로 연재하기 시작하며 6월엔 1964년의 '6.3사태' 기념일을 맞아 "한일협정과 미국의 압력"을 다루겠다고 했지만, 트럼프와 김정은의 '세기적 회담'을 전후해 1968년의 치욕적 북미협상을 알아보는 게 더 의미 있을 것 같다. 북미 정상회담을 계기로 두 나라가 거의 70년 동안 지속해온 적대 관계를 끝내거나 수교를 이루면 북한이 푸에블로호를 미국에 돌려주리라 예상한다. 북한의 핵무기 폐기보다 푸에블로호 반환이 미국인들에겐 훨씬 더 크고 값진 선물이다. 반세기 전.. 더보기
트럼프와 북미회담. 이재봉 원광대학교 교수 트럼프와 북미회담 이재봉 원광대학교 정치외교학,평화학 교수 요즘 글쓰고 강연하기가 좀 부담스러워진다. 좋아하고 즐기며 벌어먹고 사는 일이기에 웬만하면 원고청탁과 강연요청을 기꺼이 받아들이지만, 한반도 안팎의 정세가 하루 앞을 내다보기 어려울 만큼 급변하기 때문이다. 5월 24일 밤 글을 쓰고 있는데 인천의 한 지인이 문자를 보내왔다. 트럼프가 6월 12일의 북미 정상회담을 취소했다는 것이다. 곧 여기저기 카톡방을 통해서도 그 뉴스가 확산되고 있었다. 혹시 가짜뉴스 아닐까하고 즉각 백악관 홈페이지에 접속해보니 진짜였다. 마침 다음날 25일 저녁 임실에서의 강연주제가 북미관계였다. 난감했지만 대략 다음과 같이 얘기했다. 오늘 많은 사람들의 반응이 충격이나 분노 또는 실망인 듯하다. 나는 99%의 가능성도 실.. 더보기
[연재] 한반도문제와 미국의 개입, 5.16쿠데타와 미국의 역할 (3) 이재봉 익산참여연대 고문 1년만에 미국으로부터 버림받은 장면 [한반도문제와 미국의 개입] 5.16쿠데타와 미국의 역할 (3) 이재봉 원광대학교 정치학교수 4. 5.16쿠데타 발발과 미국의 대응 1961년 5월 16일 새벽 한국에서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자 매그루더 주한미군사령관은 그날 상황을 분석해 렘니처 (Lemnitzer) 합참의장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1961년 5월 16일 새벽 3시경 매그루더 사령관은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으로부터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고 있다는 전화를 받았다. 장도영은 미군 헌병들이 한국해병대를 막아주도록 요청했지만 매그루더는 거절했다. 매그루더의 요청으로 장도영이 6시 30분경 그의 집무실로 찾아왔다. 장도영은 자신이 쿠데타군의 일원이 아니라는 인상을 주었지만, 유혈 사태를 피하기 위해 쿠데타군과 협.. 더보기
은근히 5.16 쿠데타를 원했던 미국 은근히 5.16 쿠데타를 원했던 미국 [한반도문제와 미국의 개입] 5.16쿠데타와 미국의 역할 (2) 3. 사월혁명 이후 5.16쿠데타까지 한국의 상황과 미국의 대응 (1) 민족통일운동과 반미감정 1960년 7.29 총선에 따라 들어선 장면 내각과 미국을 가장 곤란하게 만든 것은 4월혁명의 영향으로 불붙은 민족통일운동과 반미감정의 확산이었다. 1960년 6월 재미동포 김용중과 일본에서 귀국한 김삼규가 통일 논의에 불을 붙였다. 이 가운데 김삼규는 1948년부터 편집국장과 주필을 지내며 이승만 정부를 비판하다 1952년 일본으로 쫓겨가 평화통일문제를 연구해온 터였다. 7.29 총선을 계기로 진보 정당과 사회단체들에 의해 활발하게 전개된 통일 논의는 곧 언론과 문단 및 학원으로 폭넓게 확산되었다. 대부분의 .. 더보기
[연재] "미국의 사람"이었던 이승만, 결국 미국에 버림받다 "미국의 사람"이었던 이승만, 결국 미국에 버림받다 [한반도문제와 미국의 개입] 4월 혁명과 미국의 개입 (3) 이재봉 원광대학교 교수 "미국의 사람"이었던 이승만, 결국 미국에 버림받다 4. 민중의 저항과 미국의 개입에 따른 이승만의 하야 1960년 3.15 부정선거로 마산에서 대규모 군중 데모가 일어나자 주한미국대사관은 미국 정부가 더욱 적극적으로 한국 사태에 개입할 것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4월 2일 매카노기 대사는 미국이 세계 다른 어느 곳보다 한국에서 능동적으로 대처해야 한다고 국무부에 건의했다. 미국은 한국의 현재와 미래에 중대한 책임을 지고 있으며, 한국은 미국의 "피와 돈"이 엄청나게 투자되고 안보가 심각하게 걸려 있는 곳이라는 이유였다. 4월 17일 매카노기는 한국 정세의 악화에 따라 ".. 더보기